|
|
▲ 영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한 장면. |
|
ⓒ2006 씨제이엔터테인먼트 |
|
이영준(31)씨는 회사 송년회 뒷풀이로 노래방에 갔다가 스트레스가 풀리긴커녕 스트레스가 옴팡 쌓였다. 회사 상사가 노래방에서도 계속 술 사와라, 담배 좀 사와라, 재떨이 좀 비워달라고 해라, 이러며 이것저것 시키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부장님 시중드느라 노래도 못 했고, 남들 노래하는데 즐기지도 못했다. 노래방에 놀러 온 건지, 노래방 아르바이트를 온 건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 부장님을 모시고, 화장실까지 같이 갔다 왔다.
재미도 없고 짜증나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중간에 가기라도 하면, 나중에 부장이 뭐라 할지 눈에 보였다. "사람들하고 어울릴 줄도 알아야지, 자꾸 빠지면 사회생활 어찌 하나?" 후배를 위하는 것처럼 지나가는 소리인양 한 마디 하실 게 뻔했다.
이영준씨는 겉으론 생글생글 웃으며 얼른 노래방 책자를 뒤적거렸다. 부장님이 찾아보라는 노래를 찾기 위해서였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아니, 노래도 자기 손으로 못 찾아?'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더니, 저쪽에선 방금 노래를 부르고 들어온 김 대리가 노래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전에 선배 하나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노래 000은 부장님 18번이거든? 절대 그 노래는 부르지 마. 그거 부르면 찍힌다."
이영준씨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악, 노래방따윈 필요 없어.'
연말이다 뭐다 해서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자리가 빈번하다. 스트레스를 풀러갔다 김 새고 스트레스가 쌓였단 소리도 만만찮다. 새해에는 이런 인간 노래방에서 만나지 않길 빌며 꼽아보는, "맞아. 맞아. 노래방 가면 이런 인간 꼭 있다".
댄스곡으로 무르 익은 분위기에 찬물 끼얹기
간만에 가수 하나 나타나 분위기 확 살리며 신나게 노래해서, 다들 신나게 장단 맞추며 춤추고 다들 광분하고 있는데, 조용히 구석배기 앉아서 노래책자 뒤적이며 노래 고르는 줄 알았더니, 불현듯 리모콘을 잡고 '예약'이 아니라 '취소' 버튼을 눌러버리는 인간. 그 바람에 가수 옆에서 탬버린 흔들고 춤추고 넥타이 머리에 매고 광란의 현장을 연출하던 모든 이들을 '순간 멈춤'이 일으킨 고요 속에 빠뜨리고, 마구 휘두르던 팔을 차마 내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포즈로 제정신까지 돌아와 쪽 팔리고 뻘쭘하게 만들어버리는 인간.(네가 싫어서 일부러 그런 거지?)
온몸이 들썩거리는 댄스곡 메들리로 다들 후끈 달아오르려는 찰나, "신나는 걸로!"란 부탁을 안고 나타난 다음 타자, 유명한 발라드도 아니고, 당최 노래가 태어난 연도를 알 수 없는 정체 미정, 시대 미정의 통기타풍 비스무리한 축축 늘어지는 노래나, 저런 노래가 지구상 아니 대한민국 가요계에 존재했나 싶게 생소한 노래를 자기만 안다는 듯이 눈까지 감고 부르거나,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 수 없는 영어로 된 팝송만 계속 부르는 인간. (참으로 잘 나시었습니다.)
남들 다 노래하니, 같이 온 이상 예의상 열심히 노래방 선곡책자 건네주며 골라보라고 했더니, 한참을 뒤적이며, 한 명 두 명, 다섯 명……. 멤버들이 다 노래하도록 노래책자 부여잡고 안 놓으면서 선곡이 안 되더니, 급기야 예약된 노래도 없는 마당에 "노래 못한다"며 빼는 인간. (아니, 누군 노래 잘해서 노래 하냐? )
무르익은 댄스곡에 급기야 노래방이 댄스방으로 바뀌며 모두들 허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흔들고 팔을 흔들며 장단과 분위기를 맞추는데, 아무리 나오라고 해도 빼더니 급기야 나온 것까진 좋은데 마이크 든 가수 옆에서, 박수도 안 치고 가만히 서있는 바람에 되레 잡아끈 인간만 민망하고 나쁜 인간 되게 만드는 인간. (노래방에 ‘아침 조례’하러 왔냐?)
여자는 모두 노래방 도우미화?
남 노래하는데 자기 흥겨운 건 좋은데, 앉아서 박수 치는 인간(특히 여자)을 끌어내서 괜히 춤추자 하면서 춤도 못 추게 부둥켜 안으려들지 않나, 손 부여잡고 안 놔주는 인간. (여자면 무조건 노래방 도우미로 보이냐?)
노래방 와서 노래는 안 하고 계속 줄담배만 뻑뻑 피워대는 바람에, 노래하느라 입 열심히 벌린 인간 모두를, 그 인간의 시꺼먼 폐 속까지 좌악 훑고 나온 담배 연기를 열심히 들이마셔주는 자리로 만들어버리며, 급기야 불만 안 났지 연기만 봐선 119 소방차라도 부르고플 정도로 뿌연 연기에 옆자리 인간 얼굴도 못 알아보게 만드는 '안개 낀 니코틴 노래방'으로 만들어버리는 인간. (내가 폐암 걸리면 네가 책임질래?)
"노래방 가자. 노래방!" 이러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집에 가야한다는 이들 막무가내로 다 붙잡아서 코트자락 붙잡고 안 놓아주더니, 정작 노래방에 들어가서 앉자마자 픽 엎어져서 잠 들어버리는 인간. 그걸로도 모자라 서비스 시간까지 다 끝나도록 안 일어나더니 급기야 집에 갈 시간이라고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는 바람에 노래방 지하에서 낑낑 매고 운반해 택시 태워 집까지 배달시키게 만드는 인간.(제정신 있을 때 집에 가라. 응?)
내가 노래만 하면, 계속 다른 인간한테 말 시켜서 뭔지 모르겠는데 나 빼고 중요한 이야기를 속닥속닥거리는 바람에, 아무리 아무리 내가 분위기를 띄우고 노래를 해도 아무도 호응 못하게 아예 원천봉쇄 해버리더니, 심지어 힐끔대며 나를 바라보며 킬킬대는 바람에 뭔가 내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불안감으로 압박하는 인간. 그리하여 대화방에 모여 나만 홀로 노래하게 만드는 인간. (내가 왕따 안 당하려고 노래방 왔지, 왕따 당하려고 노래방 온 줄 아냐?)
|
|
▲ 영화 <청춘만화> 노래방 장면 |
|
ⓒ2006 팝콘필름 |
|
지금껏 마신 술도 좀 깨고 그러게 노래방 가자고 해놓고, 술 어디 갔냐며 술 찾고 뭐 찾고, 결국 누군가 나가서 술 사오게 만들더니, 노래하는데 분위기 맞춰주긴커녕 노래방까지 와서 폭탄주 제조하고 마구 폭탄주 돌리며 노래방을 폭탄방으로 업종 변경시켜버리는 인간. (폭탄주는 술집에서 끝내지? 응?)
노래 시켜놓고, 음치라고 비웃기
"네가 안 일러줘도 내가 음치인 걸 나는 알고 있다"로 주제 파악은 하고 있는 나더러, "노래 잘 하는 사람만 노래방 오나요?" 이래놓곤 등을 떠미는 바람에, 기껏 용기 내 노래 불렀더니 "김 대리님. 노래 시켜서 미안해요" 이런 소리나 하면서 사람들과 낄낄대더니 "음치에 박치시네요. 하하하" 이런 깔끔한 마무리까지 하고도 모자라, 바로 내 뒤에 자기가 나가서 "노래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듯이 바이브레이션에 랩까지 하며 노래하는 인간. (일이나 잘하셔!)
내가 노래하는데, 리모콘 붙잡고 리듬 바꾸는 버튼을 마구 눌러대는 바람에 자꾸 바뀌는 톤과 분위기에 미치겠는데, 그걸 잘 한다고 재밌다고 낄낄대며 계속 눌러대는 바람에, 헛갈려서 헤매다 점수 20점 나오게 만드는 인간. (당최 어느 장단에 맞춰 노래를 하란 거야?)
한 번 나오면 절대 들어가지 않고, 마이크 하나 꼭 잡고 안 놓더니, 급기야 내가 나만의 스타일로 노래하는데, 옆에서 마이크 잡고 나보다 더 큰 목소리로 노래하는 인간. 심지어 나보다 노래를 잘하는 걸로도 모자라, 자기가 재즈 보컬리스트라도 되는지 막 제 멋대로 바꿔부르기까지 하는 바람에 즉석 비교 되고, 보통 때는 중간은 가던 나를 아주 무지막지하게 노래 못 하는 막대기로 만들어버리는 인간. (그래, 네 목청 굵다)
'시작 좋았고, 으음 이 노래 오늘 잘 풀리는데?' 오늘 노래 좀 된단 예감에 기쁜 마음에 둥실둥실 막 절정부를 부르려는 찰나, 예약한다고 번호 누르던 인간이 잘 못 눌러서 내가 부르던 노래 정지버튼까지 눌러놓고, 그래놓고 미안하단 말도 없이, 잘린 노래 번호를 모르겠다며, "어. 제 노래가 나오네요" 이러며 냉큼 내 마이크를 뺏어가는 인간. (너 같으면 한참 밥 맛 도는 밥그릇 먹다 뺏기면 기분 좋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