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합르페르 2006-12-28 09:42]
오래된 책에서 문자의 향기가 나듯 고택에서는 생활한 이들의 체취가 풍긴다. 가옥과 정원의 형태는 물론 문지방과 문고리, 정원에 놓인 돌멩이 하나에서도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의 취향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녹우당(綠雨堂)'은 해남 윤 씨 가문의 고택으로 고산 윤선도와 선비화가 윤두서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고산 윤선도가 기거했던 고택을 찾아가는 여정은 해남 여행의 또 다른 별미이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교과서를 통해 마르고 닳도록 읽으며 외워야 했던 공포(?)의 '어부사시사'를 지은 장본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어려웠지만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린 머릿속의 기억 한 조각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노랗게 색깔이 변한 잔디밭 뒤로 돌담과 기와와 조화로운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서 있고, 나지막한 봉우리들은 고택을 푸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돌담 끝 ㄱ자 위치에 자리한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깔끔한 정원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는 녹우당의 대표 건물인 사랑채가 기단석 위에 올라앉아 있다. 녹우당은 원래 효종 임금이 하사해 수원에 있던 것을 사랑채만 떼어 옮겨놓은 것이다. 녹우당 전체 구조가 서울 사대부가에서 유행한 ㅁ자 형인 것도 사랑채를 현재 위치에 놓은 탓이었다.
'녹우(綠雨)'는 풀과 나무가 물이 한창 올라 푸르른, 늦은 봄에서 여름 사이에 내리는 비를 말한다. '산기슭 비자나무에 한바탕 바람이 몰아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하여 윤선도 고택의 당호를 녹우당(綠雨堂)이라고 했다지만, 어떤 이들은 '오뉴월의 단비처럼 백성에게 도움을 많이 준 집'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윤선도의 증조부인 윤효종은 지역 백성들이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히자 세금을 대신 내주는 선행을 베풀었다고 하니 이런 이유에서 붙은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채에는 검정색 바탕에 글귀가 새겨진 2개의 현판이 붙어 있다. 왼쪽은 '녹우당(綠雨堂)', 오른쪽은 잘못된 것을 뽑아내라는 뜻으로 선비사상을 담은 '운업(芸業)'이라는 글귀다. 고산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로 서화에 능했던 공재 윤두서의 친구인 옥동 이서가 멋스런 필체로 휘갈겨 쓴 현판이었다. 이서는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의 형이기도 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빛바랜 사랑채는 지금 텅 비어 있지만 300여 년 전 이곳에서는 차와 술을 놓고 따스한 대화가 오가고, 아름다운 시조가 울려 퍼졌으리라. 한양과 멀리 떨어진 남도의 끝에 은거하듯 지내며 풍류를 즐겼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사랑채 옆으로는 사대부의 집 마당에 많아 '선비나무'로 불리는 회화나무가 사랑채 기와지붕을 덮을 듯 울창하고 큰 가지를 뻗고 있다. 돌담과 사랑채 사이에는 다시 안채로 통하는 문이 설치되어 있다. 여자들은 사랑채 앞의 대문을 이용하지 않고 따로 낸 솟을대문을 통해 안채까지 갈 수 있었다. 안채에는 해남 윤 씨의 후손이 대를 이어 아직도 살고 있다고 했다.
녹우당 오른쪽에 낸 솟을대문은 정겨운 돌담길을 통해 바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위쪽으로는 고산을 모신 고산사당과 증조부 윤효정을 모신 어초은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했던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녹우당 오른쪽에는 고산유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공재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 해남 윤 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관계 문서(보물 제482호) 등 유물 4619점이 전시되어 있다. 고산이 직접 제작하여 연주했던 거문고와 오우가 등 시조 19수가 실린 '산중신곡', 공재 윤두서의 대표적 작품인 비대한 백마를 그린 '백마도'는 이곳에서 눈여겨볼 만한 유물들이다.
녹우당을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펼쳐진 들판이 시원스럽다. 돌담이 가로막지 않았던 옛날에는 녹우당 사랑채 마루에서 들판을 내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뒤돌아보니 돌담에 둘러싸인 녹우당이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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