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2007년 1월 21일(일) 9:41 [오마이뉴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포이펫을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운 바람이 나오더니만 버스 안은 이내 한증막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창문을 열자니 뿌연 흙먼지가 날아 들어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어 그저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버텨내야 했습니다.
흙먼지 가득한 이 길은 사실 태국에서 시엠립을 거쳐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에 이르는 유일하다시피한 간선도로입니다. 차선이 그려져 있기는커녕 포장조차 돼 있지 않은 곳이 대부분인데다 건기(11월부터 4월까지)인 탓에 지나가는 차가 있을라치면 코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뿌연, 도로가 아닌 차라리 '사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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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이펫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앞 바퀴가 주저앉고 말았다. 이 또한 여행의 묘미라면 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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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조금도 편안히 쉴 수 없는 울퉁불퉁한 길이지만 야트막한 언덕조차 보기 힘든 탓에 한참을 가도 굽은 곳 하나 없이 곧게 뻗어 있습니다. 지평선이 미끈한 수평선마냥 아득하고 군데군데 점점이 박혀있는 마을을 지날 때면 웃는 얼굴로 손 흔들어주는 사람들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이따금씩 다리를 가설하고 도로를 포장하는 중장비의 굉음이 들리기도 하는데, 듣자니까 내년(2008년) 말쯤 포이펫과 시엠립을 연결하는 2차선 포장도로가 완공될 예정이랍니다. 하긴 이 얘기가 나온 지 십 년이 다 되었다고 하니, 그런 탓인지 사람들의 표정은 빨리 완공되었으면 하는 바람보다도 그저 '언젠가는 될 테지'라는 느긋함이 더 익숙한 듯 보였습니다.
버스가 중간에 들르게 되는 휴게소 근처가 아니면 도로변 마을이라 해봐야 예닐곱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게 고작입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듯 지붕이고 벽이고 온통 황톳빛입니다. 함석판으로 대충 이어놓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지붕에 흙먼지가 수북이 쌓여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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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선도로변 마을의 고샅길. 흙먼지를 뒤집어 쓴 탓인지 벽이고 지붕이고 모두 황톳빛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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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두어 시간 잘 버텨내던 버스에 급기야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앞바퀴가 철사를 드러낸 채 주저 앉아버렸습니다. 예비 타이어를 보니 이 역시 성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오늘 중으로 시엠립에 닿을 수는 있으리라 믿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멈춰 선 곳이 어느 한적한 마을이라서 그다지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여느 곳 같았으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너살바기 아이들이 가엾은 표정을 지으며 구걸하느라 종종 걸음으로 꽁무니를 따랐을 테지만, 이름 모를 이곳의 아이들은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낯선 이방인들을 그저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가여워 보입니다.
일행 중 누군가 준비해 온 인형을 몇몇 아이들에게 건넸습니다. 얼룩이 심하게 묻은 남루한 옷에 신발마저 신지 않은 그 아이들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척 행복해하며 들뜬 모습이었습니다. 일행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간식도 나눠 먹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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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으로부터 인형을 선물 받고 즐거워하는 캄보디아 아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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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그러나 거무튀튀한 피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누더기 옷을 걸치고 맨발로 우리 앞에 선 그 아이들을 마음 속 '우리'의 범주에 넣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처참한 가난의 풍경은 그저 '가엾다'는, 꼭 그만큼의 공감으로 거리 두기를 하며 그들과 만나고 있었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도로변 외딴 식당엘 들렀습니다. '종로 휴게소'라는 식당 이름부터 김치, 불고기, 장아찌 등 준비된 음식 메뉴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국식입니다. 머나먼 외국에서 한글이나 우리 음식 같은 익숙한 것들을 만난다는 것은 어찌 되었건 반가운 일이긴 하나, 한편으로는 낯선 곳, 낯선 것과의 만남이라는 여행 중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휴양지로 인기 높은 인근 태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캄보디아는 웬만해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 중의 오지였습니다. 접근할 수 있는 교통 여건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앙코르와트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친견하고 공부할 요량이 아니라면 굳이 와서 보고 즐길만한 꺼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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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변 외따로 서 있는 한국인 식당 '종로휴게소' 간판. 어느 현지인의 말을 빌면 현재 캄보디아 관광객의 절반 이상은 한국인이란다. 한국인 전용 식당과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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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그러나 최근 들어 '앙코르-경주 세계문화 엑스포' 등 우리나라와 캄보디아 간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고 교통 여건이 나아지면서 우리나라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과 한국인을 상대로 한 토산품점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현지 상인들이 한국말 한두 마디씩은 입에 달고 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어서 오십시오'라는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옵니다. 한국어로 적힌 메뉴판, 한국에서 가져온 듯한 달력을 보며 미리 차려진 한국식 밥상에 앉노라니 이곳이 이역만리 외국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습니다. 듣자니까 오늘 하루에만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은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여럿 있었다고 합니다.
시엠립이 가까워져서인지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종종 보입니다. 네 시간 가까이 달려서야 학교를 처음 보았고, 이곳은 주변을 통틀어 유일한 학교라고 합니다. 굶주림과 가난이 대수롭지 않은 나라에서 학교란, 교육이란 차라리 사치임을 모르진 않지만, 그럼에도 학교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내는 유일한 탈출구로 여긴다면 인구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현재 캄보디아의 많은 학교가 '2부제'로 운영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점심 때를 기준으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교육에 쏟을 예산이 없으니 학교 건물을 지을 수 없고, 교실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도로와 철도, 학교는 커녕 몸이 아파도 찾아갈 병원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는 나라에서 학교 운동장에서 즐겁게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는 것조차 측은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번듯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길거리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캄보디아 제3의 도시인 시엠립에 다 온 모양입니다. 각오는 했다지만 국경 마을 포이펫을 떠나 다섯 시간 가까이 걸린 대장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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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나절 대장정의 종착지, 톤레삽 호수에 닿았다. 가장 먼저 우리 일행을 맞이한 것은 호숫가에 늘어선 허름한 '이층' 집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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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서부원 |
| 시엠립 시내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이 우선 캄보디아의 젖줄이자 생명수라는 톤레삽 호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시내에서 자동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에 있는, 이 나라에서는 앙코르와트에 견줄 만한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덧붙이는 글 우연히 옆에 앉아 동행하게 된 수더분한 인상의 현지인이 그러더군요. 지금 캄보디아에서 가장 구경하기 힘든 것이 바로 학교와 병원이라고. 지독한 가난은 60%에 육박하는 문맹률로, 또 50세 남짓 한 평균수명으로 그들의 삶을 옥죄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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