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겨레 2007-03-02 18:18]
멀리 북한산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푸른 한강물이 출렁거린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달리기에 좋은 날씨이다. 묵묵히 달린다.
‘자박 자박’하고 운동화 바닥과 아스팔트 지면이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그런 가운데 ‘헉, 헉, 휘, 휘’하는 약간 거친 숨소리도 들린다. 한강의 둔치에 긴 행렬이 이어진다.
건강함이 넘쳐난다. 인간이 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원시시대엔 사냥을 위해 달렸을 것이다. 인간보다 빠른 동물을 향해 네안데르탈인들은 거친 숨을 내쉬며 한 손에 그리 날카롭지 않은 돌을 깎아 만든 촉을 달린 나무창을 쥐고 달렸을 것이다.
아마도 그 시대엔 잘 달리고 힘좋은 숫컷이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사냥 능력이 곧바로 인간으로서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었을 것이다. 현대인에게 달리기는 건강을 찾고, 유지하는 ‘몸부림’에 가깝다.
지난 1일 <한겨레>와 〈YTN〉이 공동 주최한 ‘3.1절 마라톤대회’에는 색다른 감동이 있었다. 일년에 몇번씩 뛰는 마라톤이지만 이번 마라톤은 정말 남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참가자들의 등쪽에 붙힌 ‘내가 마라톤을 뛰는 이유’의 사연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일년에 300여개의 마라톤대회가 열렸지만, 이번 마라톤대회처럼 등에 자신이 달리는 이유를 써붙일 수 있는 종이를 나눠준 것은 국내 마라톤대회 사상 처음이다.
출발 총성이 울리기 전까지는 준비운동과 정신적 긴장으로 다른 마라토너의 등에 붙은 글을 읽어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출발 뒤 정신적 안정을 찾으면서 앞에 달려가거나, 스쳐 지나가는 마라토너의 달리는 이유를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앞서 달리는 부부 달림이의 ‘이유’는 닭살 그 자체이다.
아내의 등에는 ‘남편을 위하여’라고 쓰여 있고, 남편의 등에는 ‘아내를 위하여’라고 굵은 매직으로 써놓았다. 얼마나 금실이 좋고, 사랑이 깊으면 저럴 수 있을까? 부부가 마라톤을 함께 한다는 것은 사랑과 정(情)이 뚝뚝 묻어나지 않고는 어려운 일임을 달림이들은 알고 있다.
‘아무 이유 없어’라는 ‘죄민수’의 독백처럼 ‘無’라고 쓴 달림이도 있다. 아마도 마라톤은 이유를 달 필요가 없이 달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중년을 넘긴 한 남자 달림이는 ‘저승길도 달려가기 위해 달린다’고 씩씩하게 써 놓았다. 또 ‘산이 있어 산에 오르듯 주로(走路)가 있어 달린다’고 나름대로 멋을 낸 달림이도 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글귀가 보인다.
눈물이 핑 돈다. 이 아버지는 마라톤 전날 아마도 이 글을 쓰며 울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몸쓸 암에 걸려 사경을 헤메고 있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주는 이 배불뚝이 중년의 아버지는 아들의 소생을 간절히 기원하면서 운동화 끈을 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을 것이다. 말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워낙 진지한 표정으로 달리는 모습을 보곤, 말 붙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 아버지는 한발 한발 뛸때마다 아들의 소생을 기원했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선배는 폐암에 걸린 회사 후배의 회복을 기원하는 문구를 썼다.
‘정일아! 꼭 일어나라’ 이 선배는 마라톤 완주 뒤 이 등판 글을 병상의 후배에게 갖다 줄 것이라고 했다. 이 선배는 10여년전 처음 마라톤 입문 동기 역시 폐암에 걸린 후배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꼼꼼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한 중년의 달림이는 ’첫째, 나의 건강을 위해, 둘째 동아마라톤 준비를 위해, 셋째는 회사의 …’라고 작은 글씨로 줄줄이 써 놓았다. 나도 달리고, 상대방도 달리니 함께 흔들려 작은 글씨를 모두 읽을 수 없었으나, 정말 꼼꼼하고 착실한 사람 같았다.
회사 후배는 ‘아들이 분 관리를 할 때까지’라고 썼다.
집안에 있는 여러개의 난초에 물을 주는 등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를 들어주지 않아 아들을 붙잡고 문안을 썼다고 한다.
한 기독교인 달림이는 ‘ONLY JESUS’라고 신앙 고백을 하기도 했다.
3.1절 기념 대회임을 감안해 ‘3.1절의 새로운 의미를 위해’라고 쓴 달림이도 있다.
이밖에 ‘건강을 위해’ ‘온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사랑, 평화’ 건강’ 등등 좋은 글귀가 많았다.
인내와 정신력, 정성이 모여 함께 달리는 마라톤이기에, 이날 달림이들의 이런 기원은 언젠가는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30㎞를 3시간 가까이 가뿐 숨을 내쉬며 달리고, 피니시라인을 지나 들어오니 이미 시상식이 한창이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완주메달을 들고, 뭔가 이룬 포만감에 가득한 표정으로 한강 둔치를 떠난다.
나는 왜 달렸을까? 한강물이 더욱 푸르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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