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YARN™♡ 【TODAY 스크랩】

【TODAY 스크랩】"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배워라"

피나얀 2007. 3. 8. 22:17

 

출처-2007년 3월 8일(목) 10:21 [오마이뉴스]



▲ 반평생 이상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늦깍이 초등학생 허영례 할머니.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는 그가 지난 1월 성인대상 학력인정 양원초등학교에서 주최한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선 그동안 글을 쓰고 읽고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풀어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검색창에 '양원초등학교' 쳐요? 이것(키보드의 '한/영'키)을 한 번만 누르면 돼요? 그라고 '검색' 들어가요? (마우스화살표가) 손모양이 안 됐는디?"

서울 양원초등학교로 가는 길은 멀었다. 집(강서구 염창동)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학교(마포구 대흥동)까지 가는 길이 아니라 인터넷의 바다에서 학교를 찾아가는 것 말이다.

허영례(70·양원초 4년)씨는 요즘 '인터넷 삼매경'에 빠졌다. 하지만 손끝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더블 클릭도 맘대로 되지 않고, 선생님께 오타 투성이 이메일을 보내도 제대로 받으셨는지 확인이 안 돼 답답할 노릇이다.

그래도 신기하기만 하다. "버튼 하나로 세상이 바뀔 날이 올 것"이라던 아버지의 예측이 사실이었으니, 갓 쓰고 시 읊던 전남 순천 출신 한 선비의 예지력은 탁월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딸자식 교육만큼은 앞서가지 못했을까.

여성의 날(3.8)을 하루 앞둔 7일, 허씨가 70을 바라보며 학교에 들어간 사연을 듣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평생 세 남자 말만 들어야 한다고 배웠지만..."

▲ 반평생 이상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늦깍이 초등학생 허영례 할머니.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는 그가 지난 1월 성인대상 학력인정 양원초등학교에서 주최한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선 그동안 글을 쓰고 읽고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풀어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 반평생 이상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늦깍이 초등학생 허영례 할머니.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는 그가 지난 1월 성인대상 학력인정 양원초등학교에서 주최한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선 그동안 글을 쓰고 읽고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풀어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허씨는 지금 갈 길이 멀다. 장래희망인 한자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동안은 생일을 챙기지 않겠다"는 폭탄선언까지 한 상황이다. 4년 전 동생의 권유로 성인 대상 학력 인정시설인 양원초등학교에 들어갔고, 한양대학원과 동국대학원 등에서 교양 아카데미도 다녔다.

뒤늦게 들어간 양원초등학교는 그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 한 곡 못하던 그가 지난 1월 30일 열린 '나의 주장 발표대회'에서는 직접 작문한 글을 외워 대상을 탔다. 겹받침이 힘들긴 하지만 말하는 바대로 쓸 수 있게 됐고, 'E마트'나 'SK텔레콤' 등도 자신있게 읽는다. W.C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다. 숙제로 피곤할 때는 커피를 마시는 세련된 습관을 배웠고, 생전 안 바르던 스킨, 로션에 외출할 때는 화장도 한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너도 학교에 다니라, 너도 곧 '컴맹'된다"는 권유 아닌 강요를 하는 탓에 "학교 다니더니 말 많아졌다"는 볼멘소리를 듣는다.

그는 "부끄러움을 벗어라"고 말한다. 어릴 적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여자들 탓이 아닌 여자로 태어난 운명 탓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여자는 평생 세 남자 말만 잘 들으면 잘 산다'고 말씀하셨다. 클 때는 아버지, 결혼 후에는 남편, 늙어서는 자손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버튼 하나로 쌀이 밥이 되고, 어두운 곳이 밝아지는 세상 아니냐."

젊은 여성 동지들에게 보내는 시 한 편

▲ 반평생 이상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늦깍이 초등학생 허영례 할머니.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는 그가 지난 1월 성인대상 학력인정 양원초등학교에서 주최한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선 그동안 글을 쓰고 읽고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풀어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 반평생 이상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늦깍이 초등학생 허영례 할머니.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는 그가 지난 1월 성인대상 학력인정 양원초등학교에서 주최한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선 그동안 글을 쓰고 읽고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풀어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하지만 현대 여성의 삶도 녹록치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세대와 달리 남성과 똑같이 교육받고 사회생활도 하지만, 편견과 싸워야 하는 피로도 감수해야 한다.

허씨는 그런 여성들을 향해 "내가 뭐 충고할 것이 있겠냐만…"이라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러시아 시인의 것이라며 시 한 편을 낭송한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낭송을 듣고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며 직접 베껴 쓴 푸쉬킨의 '삶'을 냉장고 문에 붙여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간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 뒷부분이 너무 좋다. 옛날에는 참 힘들었던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집에 아픈 사람만 없어도 삶은 행복하다."

허씨가 읊은 시처럼 삶은 종종 그를 속였다. 학교를 가야 할 7살 무렵 동생이 태어나 학교를 갈 수 없었고, 그 다음해엔 동생의 홍역 탓에 진학하지 못했다. 몇 해 뒤 학교를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6·25가 터졌다.

21살 되던 해 얼굴도 모르는 여수 도시 총각에게 시집갔다. 배우지도 못했다며 시골 출신 신부를 무시했지만, 반듯한 됨됨이만 믿고 군소리 없이 살았다. 그러다가 1980년 남편의 암 선고로 순식간에 빚더미에 올랐고, 4남매(3남 1녀)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그의 현재에 밑거름이 됐다. 허씨는 "그런 일들이 없었으면 내가 지금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애를 쓰고 있겠느냐"며 "늙어서 숙제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한이 많아서인지 귀찮지 않다"고 말한다. 양원초등학교를 알게 된 것도 과거 그의 진학을 방해했던 7살 터울의 여동생 덕분이었다.

두 시간여의 만남 동안 그는 "나이는 상관없다, 배워라"고 강조했다. 배움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신김치와 꼬막국으로 점심을 후다닥 챙겨먹은 뒤 그는 시간표에 따라 가방을 싼다. "배운 만큼 보여요, 저 같은 사람도 합니다"라며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 반평생 이상 한글을 읽지 못해 숱한 설움을 안고 살아왔던 늦깍이 초등학생 허영례 할머니.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고 쑥스러워하는 그가 지난 1월 성인대상 학력인정 양원초등학교에서 주최한 '나의 주장 발표 대회'에선 그동안 글을 쓰고 읽고 배우면서 느낀 생각들을 풀어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
ⓒ2007 오마이뉴스 남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