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안동③ 퇴계 이황, 화폐로 유통되는 조선의 마음

피나얀 2007. 3. 16. 20:36

 

출처-[연합르페르 2007-03-16 09:13]

 


안동은 유림(儒林)의 땅이다. 조선 중기 영남학파 형성 이후 유교문화가 두텁게 층위를 이뤄왔다. 과거의 전통이 오롯이 살아있어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택시기사를 만나기도 한다. 겨울과 봄이 포개지던 날, 안동 토박이인 그 택시기사로부터 거슬러 받은 1000원권 지폐에는 영남학파의 정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흐트러짐 없는 낯빛으로 경(敬)을 논하고 있었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의 땅에서 무르익은, 인간의 길을 밝히는 빛은 이미 세상 속에 무성히 드리워져 있었다.
 
 
퇴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김성일(金誠一)은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일대기인 '퇴계선생실기'를 엮었다. 그 기록을 비롯해 여러 문하생이 정리한 퇴계의 언행록을 하나씩 들춰보면 이 나라 정신사의 맥을 이룬 한 인물의 70년 생애가 눈앞에 펼쳐진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선생은 평소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이부자리를 거두어 정돈하고 의관을 바르게 한 뒤 어머니를 찾아 문안드렸다. 명랑하고, 공손함이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다. 여럿이 생활함에는 종일 정좌하여 옷과 띠를 반듯이 하고 언행을 삼가니 사람들이 감히 업신여기거나 모욕을 줄 수 없었다. 성품은 간결, 소박하고 말이 적으며 명리와 호화로움에는 마음이 없었다.
 
선생은 음식을 먹을 때, 수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찬(饌)은 매 끼니마다 두서너 가지에 불과했다. 한번은 김성일이 도산에서 모시고 식사한 적이 있는데, 상에는 가짓잎(茄葉), 무나물(菁根), 미역뿐이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되 일찍이 취하도록 마신 적이 없으며 약간 얼근한 정도에서 그쳤다.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주량에 따라 권하였으며 그 기분에 맞도록 하였다.
 
퇴계는 무엇을 주고받는 경우에 엄격하여 의로운 것이 아니면 단 한 개라도 남에게 주거나 받거나 하지 않았다. 하루는 안동 부사에 제수된 이가 찾아와 하례를 드린 다음 겸하여 고기 선물을 올렸다. 사양하다가 안 되자 우선 두어두도록 하였다가 그가 돌아간 뒤에 사람을 시켜 다시 돌려보냈다.
 
물론, 사양에도 도리가 있었다. 모든 것을 박절하게 물리친 것은 아니었다. 사귐이 있는 방백(方伯)이나 수령이 혹 교제의 예(禮)로 물건을 보내오면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도 반드시 의리를 따져서 받았다. 그리고 물건을 받으면 이웃과 친척 및 제자들에게 나누었으며 집에 남겨두는 일이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봉록(俸祿)으로 들어오는 것이 쓰기에 넉넉하였으므로 나머지는 모두 친구들을 도와주었는데, 반드시 그 친소(親疎)와 빈부(貧富)를 가늠하여 서로간의 정의(情誼)를 상한 적이 없었다.
 
퇴계는 또한 문하의 제자 대하기를 마치 붕우(朋友) 대하듯 했다. 비록 젊은이라도 이름을 버리고 '너'라고 호칭하지 않았다. 아무리 지체가 낮고 어린 자라도 소홀히 대접하지 않았다. 맞이하고 보낼 때는 예절을 차려서 공경함을 다하였다.
 
자리에 좌정(坐定)하면 반드시 먼저 부형의 안부를 물었다. 대화를 나눌 때도 반드시 상대방의 말이 끝난 다음, 천천히 한 마디 말로 이를 분석하여 가리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이 옳다고 하지는 않고, 다만 "내 생각은 이런데 어떤지 모르겠다"고만 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자의 대병(大病)이다. 세상의 의리(義理)란 무궁한 것인데, 어떻게 자기만 옳고 남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퇴계는 또한 사람을 대할 때, 희노(喜怒)의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한번은 패만(悖慢)한 영천 군수가 찾아와 뵌 일이 있었다. 그런데 거만하고 무례하여 함부로 떠들어댔으며 병풍 등을 가리키면서 글과 글씨를 평하고 논하였다. 모시고 앉았던 자들이 모두 불쾌한 내색을 했으나, 선생은 거의 얼굴에 기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매우 관대하여 큰 잘못이 없으면 끊어버리지 않고 모두 용납하여 가르쳐서 스스로 고쳐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선인(善人)만 골라서 사귀려 한다면, 이 또한 치우친 행위이다. 상대의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고칠 일이다. 선과 악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
 
임종에 관한 기록은 경오년(1570) 12월 초순 기력이 쇠하고 병이 깊어 자리에 누우면서 시작된다. 퇴계는 4일 조카에게 유계(遺戒)를 쓰라고 했다. 국장(國葬)의 예를 이용하지 말 것과 장례에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 것,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명했다. 그리고 8일 유시(酉時), 제자들에게 누운 자리를 정돈하고 부축하여 일으키라 하고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 이날 아침, "분재 매화에 물을 주라"는 당부는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