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목포③ 예향에서 느끼는 문화의 향기

피나얀 2007. 3. 21. 18:57

 

출처-[연합르페르 2007-03-21 11:03]

 


우리에게 지난 세기는 격동과 파란의 시기였고, 슬픔과 기쁨이 무수히 교차했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은 물론 도시들도 갑자기 부상하고 쇠퇴하곤 했다.
 
항도 목포의 100년 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목포근대역사관과 박화성 문학관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두 건물은 지금은 쓰임새가 달라졌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목포근대역사관, 100년 전 목포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흑백사진은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고유의 색을 잃은 사진에는 추억이 있고, 과거가 있다. 그래서인지 사진의 배경이 평소에 걷던 길이나 익숙한 건물이면 자연스레 현재와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는 기어코 차이점을 찾아내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바뀌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사진이 찍힌 시점과 오늘 사이의 간극은 매우 넓지만, 이러한 과정은 찰나에 벌어진다.
 
회백색 벽돌로 튼튼하게 세워진 목포근대역사관은 목포문화원과 함께 일제 강점기에 건축됐다.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마주쳤던 건물과 형태가 흡사해서 금세 일본식 건물임을 알 수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쓰였던, 역사의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내부에는 목포의 옛 모습과 일제의 침략사가 담긴 사진들이 걸려 있다.
 
1층에는 1920년대 말 목포의 거리, 풍습 등을 알려주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입구에는 동양척식회사가 사용했다는 금고가 있는데, 어린아이 키만 한 입구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의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인천, 부산, 원산에 이어 네 번째로 외세에 항구를 개방했던 목포는 사진이 촬영됐을 때 성세를 누렸다. 전국 6대 도시에 이름을 올렸고, 각종 상품들이 각지에서 운송돼 들어왔다.
 
그래서 동양척식회사의 지사가 목포에 터를 잡았고, 금융 도시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남도에서 생산된 김, 쌀, 소금, 면화 등 '일흑삼백(一黑三白)'의 물산이 이곳으로 집결했다.
 
사진에는 목포의 역, 경찰서, 소방서, 극장 등이 담겨져 있다. 건물은 단조로운 2층이고 사람도 많지 않다. 식수를 얻기 위해 줄을 서고, 최근에 개발되고 있는 외달도 해수욕장에 기모노를 입은 여자들이 서성거리는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안타까운 한국의 근대사는 2층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나 윤봉길 의사가 체포되는 순간이 사진으로 남겨져 있다. 또한 일본인이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 커다란 말뚝을 박는 모습 등 일제의 참혹한 만행들이 사진으로 기록돼 있다.
 
이곳에서는 사진 한 장에 얼마나 큰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 사진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효과적인지 깨닫게 된다.
 
◆ 박화성 문학관, 예향이 키운 여류 소설가
 
국토의 서남부 끄트머리에 위치한 목포에서는 국도 1호선과 2호선이 출발한다. 목포와 신의주를 잇는 1호선과 동쪽의 부산을 연결하는 2호선은 같은 지점에서 시작된다.
 
유달산 아래 조용한 마을에는 '국도 1ㆍ2호선 기점' 비석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유독 붉게 보이는 벽돌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1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목포를 지켜봐왔다. 처음에는 일본의 영사관으로 건립됐다가 해방 이후에는 시청, 도서관을 거쳐 지금은 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의 2층에는 한국 최초의 문학 기념관인 박화성 문학관이 있다.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면 그의 흔적과 만날 수 있다.
 
'강한 사회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여주었다'는 박화성의 문학관이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제 일본의 자취는 거의 다 소멸된 반면, 그의 글은 아직도 건재하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문학관의 위치가 아니라, 그가 문학을 통해 전파하려 했던 정신과 사상이다.

문학관에는 박화성의 전집과 빛바랜 원고지, 한 자씩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육필 원고, 편지 등이 전시돼 있고, 그가 생전에 집필 공간으로 사용했던 방이 복원돼 있다.
 
1904년 목포에서 출생한 박화성은 1925년 목포의 방직공장 여직공들의 설움과 참담한 생활을 소재로 이야기를 구성한 단편 '추석전야'로 등단했다. 그는 주로 민족애와 비참한 현실 문제를 다루었고, 1988년 숨을 거두기 전까지 여성 최초의 장편 소설 '백화', '고개를 넘으면' 등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목포문학'의 발간호에서 '목포의 어린 동무들은 산의 자애와 바다의 정을 느꼈을 것이오, 삼학도의 신록을 기리면서 글 쓰는 버릇을 배웠을 것'이라며 '목포의 친구들은 다른 고장 사람들보다 정서에 뛰어나고 표현에 능해서 문학적인 천질을 타고 났다는 칭찬을 들어왔다'고 기록했다. 생의 대부분을 목포에서 보냈던 그가 고향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과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문학관 한쪽에는 그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셋째 아들이 선물했다는 책상, 시어머니가 넘겨준 머릿장, 재봉틀 같은 살림살이와 안경, 부채, 지갑, 장갑 등 소소한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또한 옷가지와 즐겨 썼다는 접시와 다기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