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끝없이 펼쳐진 야생의 대서사시

피나얀 2007. 4. 2. 19:40

 

출처-[이코노미스트 2007-04-02 18:30]

 


 

▶(아래왼쪽)사파리로 떠나는 랜드로버 무리. 유럽인이 80%쯤 된다. (아래오른쪽)세렝게티 초원에서 본 사자와 하이에나. 우리는 운이 좋았다.

광활하다 못해 막막한 느낌이 드는 세렝게티 초원의 얼룩말 떼. 이곳 마사이족 말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을 가진 세렝게티 국립공원에는 수백만 마리의 동물이 자연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다른 모든 곳을 가보고 난 후 마지막으로 간다는 곳, 아프리카. 우리에게 아프리카는 대개 두 개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타잔과 라이언킹. 30대 이상은 밀림 속의 ‘타잔’을 떠올릴 것이고, 그 이하 세대는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 ‘라이언킹’의 배경이 생각날 것이다.
 
타잔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우거진 밀림 속을 종횡무진 날아다닌다면, 사자인 라이언킹은 끝없는 지평선으로 이어진 초원을 뛰어다닌다. 라이언킹이 낯설다면 1985년에 나온 로버트 레드퍼드와 메릴 스트리프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를 떠올리는 것도 괜찮다.
 
두 이미지가 다른 것은 지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타잔은 아프리카의 중서부가 무대인 반면, 라이언킹과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동부가 무대다. 서부지역에는 동부 같은 초원이 없고, 동부에는 서부 같은 밀림이 없다. 특히 케냐와 탄자니아가 있는 아프리카 동부지역은 사실 우리가 아프리카하면 연상하는 더위와 밀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케냐는 적도가 관통하는 곳이지만 연평균 기온은 영상 18도로 선선하다. 반소매 셔츠를 입은 사람도 많지 않다. 대개 긴소매 셔츠를 입고 있고 가죽옷까지 입은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워낙 먼 곳이라 그러려니 싶지만 사실 아프리카 대륙은 남아메리카보다 넓다.
 
멀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가보니 정말 멀었다. 2월 24일 인천국제공항에서 홍콩행 비행기에 오른 이들은 모두 25명. 연세가 지긋한 부부가 대부분이었다. 의외였다. 40대인 기자가 가장 젊었다. 나중에 추려본 평균연령은 60세. 오지라고 여겨지는 아프리카를 생각하면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아프리카 여행은 일정한 숫자가 채워져야 떠난다.
 
어쨌든 멀었다. 우선 비행기. 홍콩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로, 다시 그곳에서 케냐의 나이로비까지 비행기만 세 번을 갈아타고 가는 데 걸린 시간은 33시간(공중에 떠 있었던 비행시간만 22시간이었다).
 
사라진 가방…사흘 뒤 도착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은 육로 이동. 거리에 굴러다니는 차량의 절반이 거의 방역차 수준의 연기를 내뿜는 교통 지옥 나이로비를 어렵게 빠져나와 벌판을 달렸다. 그렇게 4시간쯤 달려 닿은 곳이 탄자니아와의 국경인 나망가. 천하태평인 출입국 수속을 인내심 있게 참아가며 겨우 통과한 8인승 랜드로버 차량은 마치 과수원처럼 사람 키 높이만한 나무가 적당히 서 있는 벌판을 끝없이 달렸다.
 
가도 가도 벌판이었다. 그렇게 숙박지가 있는 탄자니아 은고롱고로까지 걸린 시간은 모두 12시간 30분. 국경 통과 수속으로 멈춘 시간을 제외한, 평균 시속 80km로 달린 시간만 9시간15분이었다. 평균 시속 800~1000km인 비행기와 평균 시속 80km인 차량 이동을 다 합해 45시간30분. 여기에 다음날 아침, 숙박지에서 세렝게티까지 두 시간 이상을 달렸으므로 47시간30분. 꼬박 이틀이 걸렸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치러야 할 고생을 줄여주는 온갖 필수품이 든 가방이 행방불명된 것. 나이로비 공항에서 눈을 씻고, 목을 빼고 기다려도 고대하던 짐은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인천에서 홍콩까지 간 국내 항공사 중의 하나가(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수하물을 제때 실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도 별다른 설명도 없이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더니 결국 일을 내고야 말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홍콩 공항에서 2km가 넘는 거리를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뛰어야 했고, 가방이 도착할 때까지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가방은 궁핍한 생활이 몸에 배기 시작한 3일 후에 도착했다(사실은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분실 사고가 많기 때문이다).
 

▶(왼쪽 위) 소똥을 반죽해 만든 마사이족 움막집. 낮에는 시원하고 밤에는 따뜻하다. (위) 바위 위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는 숫사자. 백두산 천지의 30배나 되는 은고롱고로 분화구 초원에 사는 코뿔소(오른쪽 위), 코끼리(왼쪽), 오카방고 삼각주에 사는 하마(오른쪽).


이런 우여곡절 끝에 간 곳이 바로 세계 최대의 야생국립공원인 세렝게티. 말이 공원이지 공원이 아니었다. ‘근처’라고 했던 숙박지에서 8인승 랜드로버로 무려 두 시간 넘게 달려 ‘겨우’ 초원의 중앙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넓이가 경상북도만 한 세렝게티는 이곳 마사이족 말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 직접 가보니 ‘넓은’이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정말이지 나무 한 그루 없다시피 한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사바나였다(가 보면 안다). 언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생전에 꼭 가봐야 할 곳 100군데’ 중 하나로 선정한 이유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왜 이곳을 꼭 가봐야 한다고 했을까?
 
세렝게티는 우선 야생 동물의 천국이다. 인간의 개입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장관인 것은 매년 북쪽에 있는 케냐의 마사이마라 초원과 남쪽인 이곳 세렝게티를 오가는 수백만 마리의 초식동물들이다. 물
 
과 풀을 찾아 매년 800~1500km의 대장정을 하는 모습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이라면 꼭 한 번쯤 탐내는 소재일 만큼 장엄한 광경이다. 이 거대한 행렬의 주인공은 누다. 뿔은 소를 닮고, 긴 수염은 염소를 닮은 누를 중심으로 앞에는 얼룩말들이, 뒤에는 사슴만한 가젤들이 대서사시를 연상시키는 이동을 한다. 자연에 이유가 없는 것은 없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살아남은 것이다. 이들의 순서에도 이유가 있다. 먼저 얼룩말이 가장 거칠고 긴 풀을 먹고 지나가면 뒤를 따르는 누가 중간 크기의 풀을 먹고, 가젤들은 땅에 깔린 풀을 먹는다. 상부상조이고, 윈윈(win-win)이다.
 
인류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우리가 간 2월 말은 이곳 세렝게티로 옮겨온 초식동물들의 출산 시즌. 아쉽게도 장엄한 이동을 볼 수는 없었지만 초원 여기저기에서 수천 마리씩 풀을 뜯고 있는 초식동물들과 그들의 새끼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들뿐인가. 동물원에서나 봤던 사자와 하이에나, 치타까지 보는 행운을 누렸다.
 
행운? 그렇다. 정말이지 우리는 행운이었다. 이곳은 가면 볼 수 있는 동물원이 아니다. 사파리를 떠나기 전날 로지(Lodge: 원래 사냥꾼들이 묵던 오두막집인데 요즘은 관광객을 위해 지어놓은 간소한 호텔을 말한다)에서 만난 독일인들은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세렝게티를 다녀왔다는데 표정이 너무나 허탈했다.
 
“겨우 몇 마리 봤다”는 것이다. 워낙 넓기 때문에 어디에 동물들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초식동물을 노리는 사자와 하이에나, 표범, 치타는 낮에 사냥하지 않는다.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사냥 장면은 전문 다큐멘터리 팀이 한 달에 한 건도 찍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정도로 보기 힘든 장면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초원에서도 모든 것은 밤에 이루어진다.
 
스와힐리어로 ‘(사냥)여행’을 뜻하는 ‘사파리’ 앞에 ‘게임’이라는 단어를 꼭 붙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허탕치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마치 숨바꼭질처럼 찾아내기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사자, 표범, 코뿔소, 코끼리, 버펄로(물소)를 지칭하는 ‘빅(big) 5’를 중시한다. 하루 내내 돌아다녀도 그림자도 못 보는 날이 많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듯 마주치면 승(勝)이고, 그렇지 못하면 패(敗)다. 사냥 성공은 그 다음이다. 그렇게 보기 힘들다.
 

▶마사이족 마을의 여인들. 사냥이 금지된 탓에 소규모 목축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세렝게티와 그 주변은 이런 야생의 풍경과 함께 인류의 기원지로도 의미 깊은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700만 년 전 서부처럼 열대 우림의 숲이었던 이곳은 기후 변화로 초원으로 바뀌었다. 숲이 없어지자 숲에 살던 유인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먹이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원시 인류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초원을 선택했고, 침팬지는 숲에 남았다. 초원은 맹수들이 우글거렸지만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초식동물들이 자연사하는 덕분에 죽은 고기가 많았기 때문이다(수백만 마리 중 1%만 자연사해도 수만 마리다).
 
실제로 세렝게티와 세계 최대 크기의 분화구인 은고롱고로(분화구 내에 있는 평평한 초원이 백두산 천지의 30배쯤 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역시 거대한 지구대(地溝帶)인 ‘리프트 밸리(The great rift valley)’는 원시 인류의 화석이 계속해 발굴되고 있는 인류학의 현장이다. 말하자면 인류의 고향인 것이다.
 
로지에서 치른 환갑 잔치
 
야생에 대한 느낌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행한 분들의 적극성이었다. 대부분 60세를 넘긴 분이 많고, 70세가 넘은 분도 다섯 분이나 계셨지만 단 한번도 쉬운 일정을 제안하지도, 스케줄을 어긴 적도 없었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60년 동안 열심히 살았던 덕분에” 거의 대부분 남아메리카 같은, 비행기만 20번을 타야 하는 곳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그렇게 두루 여행한 후,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다고 했다. 그들은 ‘나이 지긋한 젊은이’였다.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환갑 잔치를 은고롱고로 로지에서 치른 분이다. 식당에 있던 70명이 넘는 3색 인종 모두가 한마음으로 축하하는 가운데 케이크를 자르던 부부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이었다.
 
그렇게 ‘야생 환갑잔치’를 치른 분은 “오기 전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오는 음악을 모두 악기별로 듣고 왔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한번 감동시켰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눈으로만이 아닌 온몸으로 야생을 느껴보고 싶어서 말이지요.”
 
사실 그 말에 우리는 기가 팍 죽었다. 삶을 잘사는 비결은 먼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완벽한 준비는 이번만이 아닐 것이다. 평생 그렇게 해왔을 것이다. 가슴이 움찔했던, 센 자극이었다. 귀국한 후, 당장 영화에 나오는 음악을 다시 들었다. 로버트 레드퍼드가 메릴 스트리프를 초원으로 초청한 후 들려주었던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은 다시 들어도 느낌이 새로웠다.
 
다시 한번 느낀 것이지만, 야생으로의 여행은 낯선 시간과 공간의 만남이었다. 낯선 곳에서 아침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과 문화를 만나고, 이국적인 풍경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