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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이 봄, 제비꽃 편지라도 띄울까요?

피나얀 2007. 4. 13. 22:56

 

출처-2007년 4월 13일(금) 9:47 [오마이뉴스]

 

 

▲ 남산 제비꽃, 숲 그늘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청초한 모습이 눈길을 붙들었다.

 

ⓒ2007 국은정

 

시골에서 자란 나에겐 놀이터가 따로 없었다. 문 밖으로만 나가면 나의 놀이터가 지천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햇살이 좋은 날이면 나와 7살 터울의 언니랑 함께 논둑길을 걸으면서 조그맣게 피어난 들꽃들을 보며 햇살만큼이나 따스한 시간을 보냈다.

언니는 가끔 내게 제비꽃 반지를 만들어 주곤 했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날에는 언니가 내 손에 끼워준 제비꽃 반지 생각이 난다. 사소하지만, 제비꽃을 볼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는 것이 내겐 축복이고, 기쁨이다. 모든 야생화와 꽃을 좋아하지만 이렇듯 추억이 담겨 있는 꽃에게는 더없이 애정이 담기고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알록 제비꽃.
ⓒ2007 국은정
애정이 많아지면 그만큼 알고 싶은 욕망도 커지는 법! 어느 날 흔하게 볼 수 없었던 하얀 빛의 제비꽃을 보게 된 후로 나는 다시 식물도감 속 제비꽃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는 할수록 어려운 것이라고 했던가? 식물도감 속에 나오는 여러 종류의 제비꽃에 아무리 오래 눈을 맞추고 꼼꼼히 따져 익혀 보아도 직접 낯선 모습의 제비꽃과 마주치면 머릿속에서 작은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건 나만의 고민은 아닌 듯했다.

몇 해 전에 알고 지낸 야생화 전문 사진작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야생화를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를 찍어왔지만, 자신도 제비꽃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없다는 것. 가까이 알고 지내는 야생화 전문가들조차 사정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 태백 제비꽃.
ⓒ2007 국은정


 
▲ 태백 제비꽃.
ⓒ2007 국은정
"우리끼린 가끔 그런 농담을 합니다. 제비꽃이 밤에 남 몰래 마실을 가는 게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종류가 존재할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이에요. 꽃의 색깔도 다양하지만, 그것보다 잎의 모양이 무척 다양하거든요. 그 잎 모양의 미묘한 차이를 식별해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저만치 제비꽃이 보이면 지레 겁이 나요. 이번엔 또 어떤 놈일까 싶어 긴장이 되요."

우리나라에는 대략 40여종의 제비꽃이 있는데, 교잡이 심해서 종을 정확하게 분류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변이도 많고, 심지어는 꽃잎이 온통 초록색인 제비꽃도 있다고 하니, "제비꽃의 사생활이 문란한 것 같다"는 농담도 이해할 만하다. 나 역시 내가 찍은 제비꽃의 정확한 동정(同定)에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 고깔 제비꽃, 잎의 모양이 고깔을 닮아 그렇게 불리어진다고.
ⓒ2007 국은정


 
▲ 고깔 제비꽃.
ⓒ2007 국은정
제비꽃의 다른 이름은 '오랑캐꽃'이다. 제비꽃의 모양이 오랑캐의 머리채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나라에 오랑캐가 쳐들어 올 때마다 들판에서 이 꽃이 피어나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름의 유래가 어찌되었든 외적의 침입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들판에 핀 작은 꽃에게도 '오랑캐'라는 가혹한 이름을 붙여줘야만 했던 우리 한민족의 슬픈 사연이 이 작은 꽃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빼앗긴 우리의 땅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오랑캐 들판'이라고 비유했던가 보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에 '제비꽃 편지'라는 노래가 있다. 안도현 시인이 시를 쓰고, 이수진씨가 곡을 붙여 부른 잔잔하고 맑은 노래다. 한 번 들으면 자꾸만 입에서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인데, 가녀린 제비꽃의 꽃대 위에 올라앉은 세상의 무게와 삶에 대한 담백한 고백을 담은 가사도 좋고, 시상(詩像)을 다치게 하지 않는 서정적인 곡도 참 좋다.

제비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기에

화분에 담아 한번 키워 보려고 했지요

뿌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조심 삽으로 떠다가

물도 듬뿍 주고 창틀에 놓았지요

그 가는 허리로 버티기 힘들었을까요

세상이 무거워서요

한 시간이 못되어 시드는 것이었지요

나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것도 없었어요

시들 때는 시들 줄 알아야 꽃인 것이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그대로 두었지요

- 안도현 「제비꽃 편지」


▲ 흰젖 제비꽃.
ⓒ2007 국은정


 
▲ 제비꽃,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보랏빛 제비꽃.
ⓒ2007 국은정
노랫말처럼 나도 예쁜 꽃을 보면 자꾸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다. 인간의 소유욕은 언제나 그렇듯 자연뿐만 아니라 스스로까지 다치게 하기 마련이다. 나의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자연도, 나도, 꽃도 모두 한결 가벼워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왜 자꾸 허튼 욕망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일까? 노랫말이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재작년인가, 이런 나의 욕망을 다독거리며 택한 것이 바로 씨앗을 받는 것이었다. 꽃이 질 때를 기다렸다가 꽃씨를 받아두었던 것. 씨앗도 참 작은 제비꽃!

▲ 이태 전 받아둔 제비꽃 씨앗, 유리병 속에서 오랜 잠을 자고 있는 중이다.
ⓒ2007 국은정
하지만 역시 올해 봄도 그냥 저렇게 씨앗 채로 보내야 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씨앗을 담아두었던 병에서 꺼내어 괜히 만지작거려 본다. 내가 가둔 유리병 안에서 몇 해를 그냥 보내고 있는 제비꽃 씨앗에게 자꾸만 미안해진다. 다음 해엔 이 씨앗들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