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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 이은주,1주기 추모

피나얀 2006. 2. 21. 23:50

 


 

 

 

 


1년 전, 이은주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슬펐던 건 그녀가 가족들에게 조차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우리 또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올 시간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기다렸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 눈동자에 아른거려 눈물이 났다. 누군가를 보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그 사람의 흔적을 내 가슴을 품고 담아두는 일이다. 우리 시대의 배우 이은주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이 사무치게 그립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 세상의 빛을 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걸음걸이를 멈출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평등하게 적용되는 죽음이라는 자연의 순리 앞에서는 담담해지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누가 봐도 특별히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해 2월 22일, 너무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은주의 죽음이 바로 그렇다.

 

"엄마 미안해, 사랑해 .영화가 너무 하고 싶었다.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스물 다섯의 나이로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은주. 해맑은 미소가 아름다웠던 그녀를 벼랑으로 내몬 내면의 검은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단지 우울증 때문이었을까? 우린 그 정답을 그녀가 있는 세상에서 초대장을 받기 전까지 알지 못한다. 정확한 사인이 무엇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추모의 정이 많아지는 건 짧은 생을 마감한 이은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월 22일은 이은주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1년 전 그녀의 죽음의 2월의 싸늘한 공기 사이로 전해졌을 때 팬들은 인생의 동반자를 잃은 듯 슬퍼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잠기게 한 이은주의 자살은 그녀가 대중들 앞에서 감추려고 했던 그림자의 무게를 마음으로 보게 했다.

 

 


살아생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은주'는 어쩌면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못다한 연기에 대한 미련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펼쳐내면서 말이다.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 신현림 ‘나의 싸움’ 중

 

배우의 생명은 자기만의 색깔이다. 대중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면 인기는 덧없이 사라지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이은주는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배우였다.

 

대학에선 연기를 공부했지만 어린 시절 그녀의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잠드는 순간까지 오직 피아노만 쳤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연기자의 길’을 걷지 않았다면 ‘음대교수’가 되어있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의 꿈을 키워온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그녀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연기를 시작하게 됐다. 자신에게 상의 한 마디 없이 어머니가 응모한 모델 대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그때부터 그녀는 다섯 살 때부터 13년간 동고동락하던 건반 위의 세상을 버리고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책벌레 여대생 구지원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카이스트>를 통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주목 받는 잡지모델이었다. 170cm의 큰 키를 가진 이상적인 신체조건과 야누스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는 작품마다 자신의 혼을 불어넣는 여배우였다.

 

박종원 감독이 연출한 <송어>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첫 영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자신을 보러 와주는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녀에게는 분명 ‘예쁜 배우’ 이상의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통해 확고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만든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은 그녀의 연기력을 한층 더 성숙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이 현장에서 배우들의 즉흥연기를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가주의 감독 홍상수와의 작업은 그에게 많은 경험을 안겨 주었다

 

카메라 앞에서 이은주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이미지 변신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아무도 그녀의 아우라를 의심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장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내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에 든다는 그녀는 ‘천상 배우’였다. 배역이 가진 진실성을 온 몸에 담아 표현하는 이은주의 연기에는 보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이범수와 호흡을 맞춘 <안녕 UFO>에서 그녀는 시각 장애우 역할을 맡아 절제되고 집중력 있는 내면연기를 침착하게 보여줬다. <주홍글씨>에서 가희 역할도 배우로서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였다. 시종일관 흔들리지 않는 감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영화가 크랭크 업되는 날까지 철저히 가희로 살았다. 그러나 흥행의 여신은 그녀에게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다.

 

10년간 남긴 아홉 편의 작품들. 신기루 같은 작품 속 인물에게 자신의 삶으로 생명을 불어 넣었던 사람이기에, 그녀는 떠났지만 그 분신들을 통해 우리는 그녀를 거듭 만날 수 있습니다.

 

가녀린 듯 힘있고,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전하고 싶어했던 마음, 진심 어린 맑은 눈빛, 차분한 목소리와 고아한 몸짓. 언제나 마음의 영혼을 바쳐 푹 빠져들곤 했던 빛의 세계 속에서 웃고 울고 꿈꾸었던 그녀는 진정한 영화의 연인이었습니다. -이은주 사랑 팬클럽 카페에서-

데뷔작인 <송어>부터 <주홍글씨>까지 그녀는 새로운 작품에 임할 때마다 늘 다른 톤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스크린에서 이은주의 모습은 언제나 그녀 자신과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처럼 닮아 있었다.

 

어느 것이 진짜 모습인지 헷갈리게 할 만큼,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화면에 표현해 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은 보는 이의 감정을 태워 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소설> <하늘정원> 그리고 유작이 된 <주홍글씨>에 이르기까지 유독 죽는 역할을 많이 했던 그녀는 색칠된 부분보다 하얀 여백이 더 많이 남아있는 배우였다. 그녀는 연기할 때 철저하게 캐릭터 분석을 했다. 그 동안 이은주가 보여줬던 연기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런 치밀함이 한몫 했을 것이다.

 

 


백옥 같은 피부와 사슴 같이 선한 눈망울, 단아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이은주는 데뷔 이후 또래의 배우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그녀는 자신의 연기력을 실험할 수 있는 작품에 늘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은주의 도전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연기 때문에 작품이 망가진 적도 없었다.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은 많다. 하지만 좋은 배우는 뛰어난 연기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불꽃같은 생을 살다간 이은주, 그래서 사람들은 이은주를 더 잊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이은주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지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렸지만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영원히 관객들의 가슴 속에 남아 미소 짓게 할 것이 분명하다.

 

 

출처-[맥스무비 2006-02-21 1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