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경향신문 2006-06-27 15:27]
|
익산 임피역에서 아침 일찍 만나기로 한 열차사랑(www.ilovetrain.com)의 운영자 임병국씨(35)는 열차가 들어오자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는 얼른 카메라를 들고 플랫폼에 도착한 석량짜리 통근열차를 찍기에 바빴다. 열차가 완전히 선로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았다.
“워낙 열차가 뜸하게 다니는 간이역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면 얼른 찍어야 해요. 열차가 떠나버리면 한두 시간은 그냥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는 간이역은 물론이고 서울역을 비롯해 전국에 있는 모든 630여개의 역들을 2년에 걸쳐 모두 돌아다녔다. 특히 200여개에 이르는 간이역은 한 곳을 몇 차례씩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자료도 모았다. 그렇게 모은 자료와 사진들은 그가 2001년 1월1일 만든 인터넷 홈페이지 ‘열차사랑’에 올린다.
그가 간이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들렀던 추풍령역이 사라지게 되면서부터였다. 1941년 만들어진 이곳에는 인근 초등생들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예뻤던 역사가 2003년 사라지고 그 자리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섰다. 임씨는 예전에 사진에 담아둔 구 추풍령 역사를 홈페이지에 올렸고 본격적으로 열차사랑에 간이역에 대한 글과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제 개인 홈페이지로 시작한 것인데, 지금은 회원수가 2,100명이나 됩니다. 그중에서 저만큼이나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이 60여명쯤이에요. 공무원, 기관사, 가정주부, 대학생, 심지어는 외국인까지 있습니다.”
해마다 정기모임을 두세차례씩 하고 있는데, 열성회원 중에서는 자비로 회원들의 모자와 티셔츠를 만들어 선물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쓰고 온 모자가 바로 열차사랑의 회원이 만들어 다른 회원들에게도 선물한 것이란다.
“간이역이 얼마나 귀중한 문화유산인데요. 이곳 임피역과 군산의 춘포역은 서울역보다 오래된 건물이에요. 이 두 곳이 헐릴 위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2년전부터 문화재청에 몇차례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다행히도 두 곳의 소중함을 알아보시고 문화재로 등재해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뿐이 아니다. 그는 이미 사라진 선로와 없어진 폐역사를 찾아다니며 흔적을 남기는 일도 하고 있다. 직접 자비를 들여 나무판을 사고 조각칼로 정성스레 깎은 후, 매직으로 칠한 ‘역의 이름표’를 달아준다. 지금까지 5곳의 폐역사를 찾아서 이름표를 달아줬다.
그가 명찰을 달아주고 온 중앙선의 승문역과 경북선의 양정역, 미룡역, 미산역, 반구역의 역사는 이미 헐리기도 하고 다른 용도로 쓰이는 곳도 있다. 혹시라도 자신처럼 폐역사나 폐선로를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자료라도 남겨놓으면 얼마나 기뻐할까 하는 마음 하나로 오늘도 조각칼로 폐역사 이름표를 깎는다.
정부나 철도공사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물음에 “아무나 하면 되는 거죠. 다만 ‘이게 뭐냐’며 아무 생각없이 버리지나 말았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떼어 버리는 사람이 있을까봐 가끔씩 들러서 인근 가게 사람들에게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하고 옵니다.”
그는 간이역 찾는 재미에 빠져서 다니던 IT회사도 그만두었다. 지리교육과 출신인 그는 간이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지만, 일단은 교사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간이역에 대한 자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임씨의 존재는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한 방송사에서 간이역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때도 그가 도움을 주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기획하는 제작팀에서도 꼭 연락이 온다. 전국의 철로와 역사를 마치 부처님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그에게서는 아무때나 엔터키만 누르면 간이역에 대한 자료가 쑥쑥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그림같이 예쁜 간이역들을 아무 생각없이 확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커다란 최신식 역사를 지어놓은 걸 보면 정말 소리내서 울고 싶을 정도예요. 지난달에 어렵게 모은 돈으로 일본에 간이역들을 보러 갔었어요. 거기에선 마을 사람들이 오래된 간이역을 잘 보존하고 소중히 생각하더라고요. 만일 큰 역사가 필요해서 다시 짓더라도 구역사는 꼭 마을 박물관처럼 그대로 보존하고요.”
그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 전국의 아름다운 간이역들을 돌아보는 코스를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용객이 없어서 문을 닫아야 하는 간이역들은 줄어들 것이고, 예쁜 모습도 오래오래 간직하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가끔씩 열차사랑 회원들과 간이역을 돌아보고 있기는 하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이 간이역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요즘 간이역 앞에 있는 역전상회를 가보면 간이역의 현주소를 알 수 있어요. 저는 일부러 꼭 역전상회에 들러서 음료수 한병이라도 사 마시거든요. 얼마전 어떤 역전상회에서 박카스를 하나 샀는데 따보니까 병뚜껑이 녹이 슬었더라고요. 유통기한을 보니까 벌써 5년전에 끝난 것이더군요. 대도시에서 그랬다면 당장 바꿔달라고 했겠지만, 가슴이 짠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지요.”
![](http://www.xn--910bm01bhpl.com/gnu/pinayarn/pinayarn-pinayarn.jpg)
'♡피나얀™♡【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춘하추동 달라지는 간이역 (0) | 2006.06.27 |
---|---|
숨·쉴·틈 ‘간이역’ (0) | 2006.06.27 |
축구와 탱고의 나라,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다 (0) | 2006.06.27 |
땅속에서 숨뿜는 1,500년전 백제 (0) | 2006.06.27 |
와! 백로, 왜가리의 소나무 숲 (0) | 2006.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