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합르페르 2006-09-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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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찰칵' 카메라의 셔터 소리만이 무거운 정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뭉게구름 흐르는 푸른 하늘과 짙푸른 갈대밭, 금빛으로 물들어 구불구불 흘러가는 순천만(順天灣)의 해질녘 풍경은 모두를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게 했다.
빨갛던 해는 어느덧 고흥 반도 위를 점거한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검붉어진 하늘이 하루의 마지막을 알릴 무렵 오직 한 곳에만 시선을 모으던 사람들은 '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겨 현실 속으로 되돌아갔다.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의 순천만(順天灣)은 남쪽이 넓은 바다와 닿아 있지만 큰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온전한 항구 하나 갖추고 있지 않다. 반도와 반도 사이의 공간을 드넓은 갯벌이 꽁꽁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갯벌 너머 내륙 쪽으로 벼가 자라는 논이 있지만 그렇게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지금은 이곳이 순천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됐지만 예전 이곳은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짱뚱어와 게를 잡던 생활공간에 불과했을 뿐 제대로 된 특산물 하나 없는 곳이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소설 '무진기행' 중)
소설가 김승옥 씨가 순천을 무대로 삼은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에서 이곳의 명산물로 '안개'를 꼽았던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으리라. 뚜렷한 명산물이 없어서 소설가는 안개에 시선을 돌렸고, 안개는 한국 현대문학의 최고 소설을 탄생시킨 소재가 되었다.
소설 속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몽환적인 공간으로 비춰졌던 순천만의 한낮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수리를 따갑게 하는 태양 아래의 순천만은 그늘 한 뼘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을 분지처럼 감싼 낮은 산봉우리들과 남쪽의 섬들은 희뿌연 형체만 드러내고 있고, 순천만 한가운데서는 세상에는 오직 푸른 하늘과 초록색 갈대밭만이 있다는 듯 하늘과 갈대밭이 푸르름의 경쟁에서 조금의 양보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순천만의 중간쯤에 위치한 자연생태관을 방문했다. 부모와 함께 생태관을 찾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1층과 2층을 오르내리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순천만을 찾아오는 대표 조류인 흑두루미를 비롯한 텃새와 철새들의 박제품이 전시되어 있고, 갯벌의 생성과정과 순천만 갯벌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마련되어 있다.
1층 로비 한쪽의 모니터에는 생태관 옥상, 사수문, 장산갯벌체험장, 용산전망대 등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전달되는 순천만의 모습이 시시각각 비치고 있었다. 만조(滿潮)의 순천만은 푸른 갈대가 무성했다.
순천만 서쪽에 위치한 '장산갯벌체험장' 입구에는 자동차 몇 대가 멈춰서 있다. 갈대밭과 농지를 가로 막은 흙 둑을 넘자 푸른 갈대밭 사이로 좌우로 이동할 수 있는 사각형의 전망 데크(Deck)가 설치되어 있고, 데크 끝에서는 갈대군락 사이로 넓은 갯벌이 시작되고 있었다.
멀리 갯벌 위로 10명 남짓한 어린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인근 미술학원에서 이곳으로 체험학습을 나온 길이었다. 둑 쪽으로 향하는 한 남자 아이는 얼굴이며, 목과 팔다리 등 드러난 모든 곳이 온통 검정 개흙으로 뒤덮여 있다.
태양빛을 받은 갯벌은 가물 때의 논바닥마냥 '쩍쩍' 금이 그어져 있었다. 가끔 여유롭게 일광욕을 즐기던 게들이 갑작스런 인간의 출현에 화들짝 놀란 듯 갯벌 속으로 빠르게 숨곤 한다. 발목 정도만 갯벌에 담근 소심한 어린이에서부터 허리 아래까지 집어넣고 온통 개흙을 뒤집어 쓴 개구쟁이 아이까지 어린이들은 천연의 갯벌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떤 어린이는 게들을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 어린이는 갯벌 속에서 신발을 잃어버렸다며 급기야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갯벌은 어린이들에게 천연 놀이터가 되고 있었다.
순천만 뚝길을 따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자동차를 달렸다. 뚝길 곳곳에 탐조대가 설치되어 있지만 기대했던 철새들은 조금 더 계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뚝길 끝의 대대포구에 차를 멈추고 갈대밭으로 이어진 '무진교(霧津橋)'를 건넌다. 남해를 향해 굽이치는 물길에는 탐사선들이 포구를 드나들고 있었다.
무진교를 건너자 초록빛 세상이 펼쳐졌다. 갈대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걸음은 흥겹다. 바람이 갈대밭을 헤집고 다니면 머리를 산발한 갈대들은 뜨거워서인지 정신을 잃은 탓인지 이리저리 출렁대며 '쏴아~, 쏴아~' 작은 소리를 냈다. 출렁이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흰색 양산을 들고 푸른 갈대밭 사이를 지나는 여인의 모습이 소설 '무진기행'에서 노란색 양산을 쓴 여선생 '하인숙'을 떠올리게 한다.
손을 맞잡은 연인들은 한가롭게 갈대밭 사이를 거닐고, 개구쟁이들은 게를 잡겠다며 실 끝에 미끼를 묶은 나무 꼬챙이를 들고 갈대밭 아래쪽을 살핀다. 무거워 보이는 카메라 장비를 들고 갈대밭 너머 용산전망대로 향하는 사진작가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띈다.
그늘 한뼘 없어도 갈대의 푸르름과 시원한 바람, 바람과 갈대가 합주한 자연의 음악이 청량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불붙듯 노랗게 출렁거릴 올 가을의 순천만을 떠올려본다. 지금보다 더 영화 속 같은 풍경이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갈 것 같았다.
고흥반도 쪽으로 해가 서서히 기울어갈 무렵 대대포구에서 관광객 10여 명과 함께 '순천만 1호' 탐사선에 올랐다. 전망이 가장 좋은 탐사선의 맨 앞쪽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배는 굉음을 내며 속도를 냈다.
갯벌의 영향으로 검은빛에 가까운 바닷물이 배가 지날 때마다 하얀색 포말을 좌우로 힘차게 뿜어댔다. 초록빛 갈대밭이 좌우를 막던 풍경은 10여 분을 달려가자 검은색 갯벌이 펼쳐진 광대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서서히 속도를 늦추던 배가 왼쪽편의 갯벌에 머리를 기댔다. 붉은빛 칠면초가 갯벌 위를 한가득 채우고 있다. 초록빛 갈대 바다에 뜬 붉은색 칠면초의 섬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뱃머리로 몰려든 관광객들이 칠면초 군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시끌벅적하다.
탐사선이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배가 한 번 더 멈춰선 곳에서는 한 무리의 새들을 볼 수 있었다. 흰색 백로들과 갈매기들 주위로 100여 마리는 될 듯한 조그만 도요새들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까 전에 왔을 때는 백로가 한 20여 마리 있어서 장관이었는디, 저쪽 동네로 이사갔는가 봅니다. 자연은 자꾸 움직이니까 그렇죠."
탐사선 출발 전 '새들이 있는 좋은 광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 것'이라며 확신 가득한 말을 건넸던 순천만 1호의 김대우(52) 선장은 지금의 모습이 실망스러운 듯 일행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천만 갯벌은 넓지요. 물이 빠지면 80m 남짓한 강폭 외에는 모두 뻘입니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고, 건강상태는 세계 최고입니다. 한번 냄새를 맡아보세요. 바다내음, 갯내음이 전혀 안 납니다.
요즘 바다들이 적조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순천만은 갯벌이 건강해서 적조가 발생해도 생물들이 죽지 않습니다. 벌교 꼬막이 맛있는 이유는 갯벌이 건강해섭니다."
순천만 갯벌은 보성 벌교 갯벌과 함께 연안습지로는 국내 처음으로 습지 관련 국제기구인 '람사(RAMSAR) 협약'에 올해 1월 등록됐다.
순천만 갯벌 자랑에 침이 마르던 김 선장은 "조물주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갯벌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보호해야 한다"며 말을 맺었다. 대대포구로 돌아오자 해는 더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순천만의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동쪽의 용산전망대로 가야했다. 좁은 들길과 논길을 통과하고, 해룡면의 농주리 마을을 지나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멈췄다. 대대포구 옆의 무진교를 건너 40여 분을 걸으면 용산전망대에 닿지만 장비가 많은 사진작가들은 자동차로 20여 분을 달려와야 했다. 전망대까지는 10분여 만에 오를 수 있었다.
전망대에 도착하자 족히 10여 대는 넘는 카메라가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태양은 아직 고흥반도 위에서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아래에 펼쳐진 순천만은 초록빛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고, 왼쪽으로는 붉은 융단의 칠면초 군락이 자리하고 있다. 물이 빠지고 있는 순천만에서 바다로 향하는 물길은 서서히 S자의 날렵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떨어져가면서 물길 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여간다. 물길을 따라 유람선이 지나자 금빛 공작이 꼬리를 활짝 펼치며 날아오른다. 그리고 수많은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침묵의 대기를 흔들었다.
고흥반도 위에 뜬 하얀 구름 뒤로 태양이 모습을 감춘다. 시간이 지나면서 태양은 오렌지빛으로, 금빛으로, 잘 익은 홍시빛깔로 구름을 물들이더니 이내 동쪽의 구름마저 붉게 물들여간다. 이제 땅 위의 공간은 온통 붉은 빛이다.
붉은 빛도 잠시, 초록세상은 검게 변하고 있었다. 더욱 선명한 S자 물줄기의 풍경도 회색빛에서 진한 회색빛으로 명암을 달리해갔다. 와온마을과 화포, 멀리 순천시내에서 밤을 알리는 불빛들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올 무렵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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