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오마이뉴스 2006-09-18 18:49]
▲ 한국전쟁의 폭격속에서도 파괴되지 않은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2006 김기동 |
축성 후 1800년대까지는 꾸준하게 보수가 이어져서 19세기 말까지는 처음 지어졌을 때 화성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 정조이후 순조·헌종·고종이 화성 인근에 있는 융건릉으로 수차례 행차함에 따라 화성도 계속 보수·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00년대 이후 화성은 보수의 손길에서 멀어졌다. 일제강점기 동안 화성행궁이 철저히 파괴되고 성곽 또한 방치된 채 곳곳이 무너지고 훼손 되었다. 더구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수원은 전선의 한복판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결과 시가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성곽 일대가 폭격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화성은 몇몇의 시설물만 남겨놓고 대부분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그 후 화성은 1970년대 복원 정비사업에 의해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
복원에 근거가 된 <화성성역의궤>
▲ 화성성역의궤 |
ⓒ2006 김기동 |
의궤에는 공사 수행 중 오간 공문서와 왕의 명령, 상량식 등 의식,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과 각 건물별로 소요된 자재의 내용과 수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체 공사비용의 수입과 지출 내역도 꼼꼼히 수록되어 있다.
1975년부터 시작된 성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은 절대적인 근거 자료가 되었다. 의궤가 없었다면 완벽한 성곽의 복원은 불가능 하였다.
▲ 1920년부터 벽체가 무너져 내린 동북공심돈의 처참한 모습 |
ⓒ2006 김기동 |
▲ 화성성역의궤의 동북공심돈 설계도 모습 |
ⓒ2006 김기동 |
▲ 화성성역의궤의 설계도에따라 복원된 동북공심돈 모습 |
ⓒ2006 김기동 |
화성은 많은 부분이 보존되지 못하고 1970년대에 복원되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시 얼마나 정확하게 복원되었는지가 평가의 관건이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의 등록을 위해 유네스코에서 파견돼 화성을 방문한 조사자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부분도 역시 정확한 복원 여부였다.
화성 축성 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가 있었기에 유네스코 조사관은 어떠한 결함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화성성역의궤>를 본 유네스코 조산관은 그 방대하고 상세한 자료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것. 완벽한 공사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가 없었다면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 한국전쟁때 파괴된 장안문 모습 |
ⓒ2006 김기동 |
▲ 화성성역의궤의 장안문 설계도 모습 |
ⓒ2006 김기동 |
▲ 화성성역의궤의 설계도에따라 복원된 장안문 모습 |
ⓒ2006 김기동 |
3일간의 화성 현지 방문 조사를 마친 유네스코 조사관은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밖에 안 되지만 성곽의 건축물들이 동일한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특히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는 '화성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고도로 발달된 과학적 특징을 고루 갖춘 근대초기 군대 건축물의 뛰어난 모범'이라고 하였다.
▲ 봉돈의 모습 |
ⓒ2006 김기동 |
우리나라가 보유한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는 훈민정음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앞으로 화성성역의궤도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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