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합르페르 2006-10-27 09:28]
누군가는 장흥을 '은둔의 땅'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선비들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낙향하기도 했으니 이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청렴하게 지낸다는 의미에서 나온 표현일 터인데, 실은 장흥이 숨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다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광주나 목포에서 1시간쯤을 더 달려가면 모습을 드러내는 장흥에는 인근 강진의 청자 도요지나 보성의 다원처럼 지역을 대표할 만한 볼거리가 없다. 장흥 사람들이 못내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큰 공장이나 굴뚝이 없어서 공기가 깨끗하고 물이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또한 강과 산과 바다가 고루 조화를 이루는 자연이 아름답고, 길쭉한 지역 전체에 소소하고 담담한 명소가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어 '발견의 재미'가 있다. 시간적 여유를 두고 스트레스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다.
소촌의 풍치를 향유하다
장흥군에서 지정한 농촌 체험 마을 10곳 중 하나인 상선약수 마을은 장흥읍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맛도 좋은 약수가 샘솟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름드리 비자나무 가로수 사이로 누런 벼들이 무거운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가을 풍경이 참으로 매혹적이고 푸근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말했는데 최고선은 물처럼 부드럽고 모나지 않다는 뜻이다. 상선약수 마을의 길은 곧지 않고 물처럼 굽이쳐 흐르며 곡선을 형성해 운치 있고 고즈넉했다.
우리 나라의 길은 예부터 일부러 멀리 돌아가더라도 직선으로 길을 내지 않았다. 곡선으로 길을 닦아두면 좋은 기는 온전히 마을에 남고 나쁜 기는 침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멋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마을 한가운데 연못을 둘러싼 배롱나무에서 꽃이 필 때 손님을 받는다. 한여름부터 가을까지 100일 넘게 개화한다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나무의 이파리는 이미 소(沼)에 투신해 부유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똑바르지 않고 이리저리 휘어 있어 마을의 골목과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상선약수 마을에 있으면 마음이 느긋해져 서두르려고 애쓰지 않게 된다.
마을 뒤에는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한 대나무 군락이 있다. 공기를 담뿍 들이마시며 산책할 수 있는 시발점에는 뾰족한 잎들이 하늘을 가려 햇빛이 들지 않을 만큼 무성했다. 쭉쭉 뻗은 가지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일사삼정(一寺三亭)을 벗삼다
탐진강은 영암에서 발원해 장흥 유치면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해로 흘러든다. 물의 흐름이 바뀌는 곳에 '탐진댐'이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물이 채워지니 남도의 정경이 아니라 강원도 어딘가에서 본 듯한 풍경으로 변했다. 장흥 사람들은 탐진강을 '고향을 사랑하는 강'이라는 뜻의 애향강(愛鄕江)이라 부른다는데, 본향이 사라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장흥은 역사적으로 주류에 항전한 고장이었는데, 조선 후기 동학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마을이 피폐해져 3ㆍ1운동 때는 만세를 부를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보림사가 빨치산의 안식처로 사용돼 병화(兵火)를 겪기도 했다.
보림사는 탐진강을 앞에 두고 수줍게 핀 연꽃처럼 산세에 살포시 안겨 있었다. 일주문을 넘어 사천문에 들어서니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라고 적힌 거대한 현판이 걸려 있다. 문 밖에서도 평지에 지어진 거대한 사찰임이 느껴졌다.
문의 좌우에 용이 조각돼 있는데, 서쪽 용만 여의주를 물고 있었다.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사람살이라고 하지만 물질이 아니라 세상에 소중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암시인 듯했다.
비스듬히 난 길을 걸으면 대적광전 앞에 불국사 석가탑을 닮은 삼층석탑과 석등이 길손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거뭇해졌지만 청아한 매력을 내뿜는 것이 장흥의 이미지와 흡사했다.
드넓게 펼쳐진 남도의 평야처럼 평평한 기단에 끝부분을 살짝 들어올려 우아함을 살렸다. 자그마한 석등이 토라진 듯 평행선을 긋고 있는 두 탑 사이의 균형을 완벽하게 잡아주었다.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명부전(冥府殿)을 지나니 나무에 동그랗고 탐스러운 주홍빛 감들이 만추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수변에는 강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고자 했던 선비들의 유물인 정자가 곳곳에 남아 있다. 강진과의 경계에 위치한 사인정(舍人亭)은 백범 김구 선생이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하룻밤을 머물렀던 곳이다.
부춘정(富春亭)은 송백림, 탐진강과 어울리는 경관이 수려하며, 동백정(冬柏亭)은 정원에 심어진 동백나무와 소박한 돌담이 인상적이다. 모두 조선시대 건축물로 근래에 수리해 고풍스러운 느낌은 줄었으나 대청에 앉아있으면 소나무의 향기와 새의 지저귐이 심신의 긴장감을 이완시킨다. 모습은 변화했어도 용도는 그대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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