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연합르페르 2006-10-27 09:30]
'가을볕 따사로운 오후의 언덕에서 바라보면 달빛보다 희고, 이름이 주는 느낌보다 수척하고, 하얀 망아지의 혼 같다'는 억새와 만나기로 했다. 세상을 태울 것처럼 붉은 단풍과 함께 가을 산행의 백미로 꼽히는 억새는 수수하지만 초라하지 않다. 홀로 존재하지 않고 무리지어 만발하는 탓이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정상인 연대봉까지는 2㎞ 거리니까, 오르막이라 해도 1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바위투성이인지라 초장부터 만만치 않았다.
산림욕하는 기분으로 뒷짐 지고 천천히 등산할 수 없는 험로였다. 중심을 잃게 될까 두 손으로 중심을 잡으면서 보폭을 넓게 하여 다음 돌로 올라야 했다.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내변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천관산(天冠山)이 기암괴석과 소나무로 유명한 이유를 알 듯했다.
암석으로 중무장한 초입을 벗어나니 약간 경사가 심한 흙길이 나타났다.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막 흐르기 시작한 땀을 닦아주고 산 아래로는 녹색 평야와 대덕읍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등산로는 사람들의 통행이 잦지 않아서인지 비좁은 데다 키가 작은 잡초들이 무질서하게 자라 자꾸만 무릎 언저리에 차였다.
거친 숨을 눌러가며 30분 남짓 걸음을 재촉해 불영봉에 이르렀다. 꼭대기인 줄 알고 좋아했지만 이제 절반에 불과하다고 했다. 곡창지대인 전라남도의 드넓은 농지가 연둣빛으로 물들어가고, 작은 섬이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압권이다. 산 아래를 조망하고 굽어보며 세속을 잊는 첫 번째 희열이 다가오는 순간이다. 잠시 바위에 앉아 목을 축인 뒤 억새밭으로 향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고갯길이 계속됐다. 반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코스를 따라 이동하니 조물주가 빚은 장흥과 다도해의 풍광이 획일하지 않고 조금씩 달라지며 흥미를 유발한다.
보이지 않았던 낙도가 부끄러운 듯 조심스레 이방인을 엿보더니 어느새 손을 흔들며 반기고, 정남진과 득량만이 해무 뒤에 숨어 어슴푸레 나타난다. 억새가 나타나기 전까지 혹시 지루해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준비한 식전행사인 셈이다.
좁다란 길에는 친근하고 소박한 민초들의 나무인 싸리나무가 집단을 이뤘다. 태워도 연기가 나지 않아 빨치산이 밥을 지어 먹을 때 땔감으로 이용했다는 싸리나무 군락을 지나자 억새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사람 키 정도의 억새가 능선을 휘감아버렸다.
주연 배우의 입장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고 이목은 한 곳으로 집중된다. 힘겨운 산행으로 인해 요동치던 심장의 박동은 금세 두근거림으로 바뀌고, 헉헉거리던 숨소리는 경이로움의 감탄으로 전환됐다.
연대봉에서는 쾌청하게 갠 전망 좋은 날이면 한라산이 가까이 다가선다고 하지만 가까운 완도에 만족해야 했다. "한라산 어디요? 아따, 안 보이네. 눈 좋은 사람이나 보제."라며 아쉬워하기 일쑤다.
하지만 거센 바람 속에서 사각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면 환희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억새가 은빛 물결로 초대한다. 흩날리는 억새의 깃털이 은색 비단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반갑기만 하다. 회색으로, 흰색으로, 석양빛을 받아 화려한 금색으로 변화무쌍하게 둔갑한다. 눈꽃처럼 새하얗진 않지만 회색과 섞인 은은한 백색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구룡봉부터는 험한 내리막이 진행되는데 중간 즈음 탑산사지에 들러 씁쓸하면서도 끝맛이 달짝지근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곳에서 15분 남짓만 더 가면 산행은 마무리된다.
Tip_ 현대문학의 산실 장흥, 천관산 문학공원
모자는 혹여나 남이 눈치 챌까 두려워 동 트기 전부터 눈이 쌓인 산을 넘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들은 이별의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버스에 올라탄다. '덜크렁덜크렁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그를 훌쩍 실어 가버리는구나.'
주벽에 빠진 형으로 인해 가세가 기울자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작가와 어머니의 사랑을 담고 있는 소설의 클라이맥스다. 이 글을 쓴 소설가 이청준 씨는 장흥에서도 골짜기인 회진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담담한 필치로 고향에서의 추억을 작품으로 남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눈길'이다.
장흥은 이청준 소설의 모태이자 무대이며 아직도 회진면에는 그 버스 정류장이 남아 있다. '아제아제바라아제'를 쓴 한승원 씨 역시 장흥 바닷가에 살면서 남도의 언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소설가다.
걸출한 현대 소설가를 여럿 배출한 문학의 고장, 장흥에는 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문학공원은 장천재와 함께 천관산 등산의 기점이 되는 곳에 자리한다. 또한 빼곡하게 쌓아올린 돌탑과 코스모스가 인도하는 길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입산 전후에 하늘거리며 군무를 추는 야생화처럼 아름다운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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