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파이낸셜뉴스 2006-12-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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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직장인 서모씨는 요즘 술만 마시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씨는 몇 년 전만해도 술 마시는 게 좋지 않지만 회사 접대 일을 자진해서 떠맡기도 했다. 덕분에 승진도 빨라졌다. 하지만 부장이 된 3년 전부터는 자신이 온갖 핑계로 술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 술자리의 목적과 상관없이 자신이 먼저 취해버리는 것이었다.
올해는 술 마시는 날이 일주일에 4번 가량 되고 술을 마시면 3차까지 사람들을 끌고 다녔다. 술자리가 파한 후에도 혼자 한 잔 더하고 주위사람들과 싸움을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심한 경우에는 길에 쓰러져 잠이 들 때도 있었다.
서씨는 이제 불안하다. “내가 어제 또 무슨 실수를 했을까. 하지만 난 알코올 중독은 아니야. 일주일에 두세번 과음할 뿐이고, 마셔야 소주 한두 병이잖아. 다른 남자들도 다 이 정도는 마시는 걸….”
■알코올 의존증 멀리 있지 않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서씨가 알코올 의존증이며 치료가 필요하다고 진단한다. 우리는 흔히 알코올 중독자라 하면 술병을 든 채 공원 벤치에 쓰러져 자고 있는 부랑자나 술기운이 떨어지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움켜잡고 단숨에 마셔 버리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케이지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알코올중독 진단에서 술마시는 양과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술로 인해 신체와 정신건강, 사회적, 직업적 기능, 그리고 가족 관계 등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가장 큰 기준이다. 가족으로부터 어느날 ‘이제 술 좀 작작 마셔라’라든가 ‘지겨워서 못 살겠다’라는 불평을 듣는 순간, 이미 알코올 중독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이다.
소위 ‘필름이 끊긴다’는 이 현상은 기억상실증과는 다르다. 필름 끊김 현상은 알코올이 대뇌의 해마부분에 직접 영향을 미쳐 뇌의 정보 입력, 저장, 출력 과정 중 입력과정에 이상을 일으킬 때 발생한다. 출력과정의 고장 때문에 생기는 기억상실증과는 문제 발생 영역이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저장된 정보가 없으니 출력할 정보도 없는 것. 따라서 필름이 끊긴 사람이 무사히 집을 찾아오는 것은 과거 뇌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를 출력하여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음주문화는 한번 술을 마시면 끝장을 보는 경우가 많기에 너도 나도 이 필름 끊김 현상을 경험한다. 때문에 ‘누구나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긴다. 하지만 이 현상은 알코올의존증 초기에서 중기에 접어드는 순간에 나타난다. 필름 끊김이 6개월에 2회 이상 나타난다면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심해지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필름이 끊기는 ‘베르니케 증후군’에 걸릴 수도 있다. 또 알코올 의존에 해당될 정도는 아니지만, 반복적인 음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술을 마시는 경우는 ‘알코올 남용’이다. 1년 동안 다음 4가지 항목 중 한 가지만 해당되어도 알코올남용으로 진단된다.
▲반복적인 음주로 인해 직장, 학교, 가정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거나(결근, 근무의 태만)
▲신체적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술을 마시는 경우(음주운전, 취중 기계작동)
▲음주와 관련된 법적인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교통사고)
▲술로 인해 사회적 또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음주(가족이나 친구와 언쟁, 취중 폭력)등이다.
■좋아서 마신 술, 독으로 돌아온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술을 음료 또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항생제, 수면제, 소화제 같은 일종의 약물이다. 술은 마취제나 수면 안정제와 같은 비특이성 중추 신경 억제제다.
술에 의한 행동의 변화는 대뇌의 어느 부위가 가장 예민하게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충동 억제 중추가 예민한 사람이 술을 먹으면 충동 억제기능이 억제됨으로 흥분하여 공격적이고 난폭하게 바뀌고 각성 중추가 예민하게 억제되는 사람은 술만 마시면 잠이 든다. 감정 조절중추가 예민한 사람은 감정 조절 기능이 억제되어 주위환경과 무관하게 웃거나 울거나 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알코올의존은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하나의 질환으로 봐야 한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는 처음에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좋아서 마신다. 이 때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술을 마시거나 모임 등에서 자연스럽게 접한다. 하지만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알코올에 대한 내성이 증가한다. 이 때문에 예전보다 많은 양을 마셔야 취하는 단계가 된다.
다음에는 알코올로 인한 기억상실이 온다. 이 때부터는 술이 필요해서 마신다. 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기분이 좋아지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후 음주 행동의 합리화나 가족 및 친구의 회피가 생긴다. 술 마신 후 기억이 나지 않으면 음주를 했다는 것에 죄책감까지 느낀다.
지속적인 음주로 인한 사회적 열등감, 가족과의 불화 등이 이어지면 괴로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하여 또다시 술을 마시게 된다.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 몸에서 술기운이 빠질 때 금단증상이 나타나고 손이 떨리거나 땀이 나며 신체의 여러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신촌세브란스 정신과 남궁기 교수는 “특히 알코올의존 환자의 자녀가 다시 알코올 의존 환자가 될 확률이 높다”며 “가족 중에 알코올로 인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치료하나
서씨는 스스로도 자신의 술 문제가 걱정이 된다. 하지만 병원에 가기가 두렵다. 남들에게 알코올 중독자로 낙인찍히는 것도 두렵고 살벌한 정신과 폐쇄 병동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은 외래 치료가 가능하다. 스스로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정신과 외래를 방문하여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술을 끊고 나서 손이 심하게 떨리고, 손발에 땀이 나며, 헛구역질과 구토, 불안, 경련 발작 등의 심한 금단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는 벤조디아제핀계 약물과 고단위 비타민 B복합체를 처방 받으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환자는 가벼운 금단 증상만을 경험하기 때문에 바로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다.
서씨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후 음주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교정을 위한 인지행동요법을 받을 수도 있다. 또 알코올리즘 환자의 단주 기간을 연장시키고 음주량을 감소시키는 아캄프로세이트와 날트렉손 등의 항갈망제를 처방받기도 한다.
또 병원 치료 중 또는 치료 후에 단주 동맹(AA)에 참석할 수도 있다. 민간의 금주운동단체인 AA는 알코올 중독으로부터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알코올 중독환자들의 자조치료모임이다. 물론 알코올 의존 치료에는 가족 특히 배우자가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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