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오마이뉴스 2006-12-2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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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지는 시간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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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강기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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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은 짧습니다. 무엇을 할까 머뭇거리는 사이 해는 산자락을 넘습니다. 산촌에선 장작 몇 개 패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는 이야기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쌀 씻어 밥물 보는 사이 어둠이 왔다는 이야기도 빈말이 아닙니다.
산촌의 어둠은 도시의 어둠처럼 화려함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산촌의 어둠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먼저 데리고 옵니다. 그 때문에 행복을 잃은 사람은 끝내 웃을 수 없는 곳입니다. 잠시 웃는다 해도 곧 외로움과 친구해야 하는 게 산촌의 밤입니다.
산자락에 걸린 태양은 꺼져 가는 촛불 마냥 위태롭습니다. 작은 바람에도 스러질 빛입니다. 이 시간은 하루 중에서 가장 겸손해지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둠이 짙어 사물마저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이면 하루를 정리해야 합니다.
해 지는 시간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금방 후회하게 만듭니다. 정직해지지 않으면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시간입니다. 해 지는 시간이면 잠시 가리왕산을 떠나 설악으로 갑니다. 설악산 아무 골짜기에라도 가면 이성선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해질 무렵이면 시를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시인을 만나 그 이유를 들어봅니다.
해 지는 시간에는 시를 쓰지 않는다 스러지는 빛이 쓸쓸히 내 목숨을 바치다 떠나고 나무 사이로 그 분의 젖은 눈빛도 한참이나 나를 보다가 돌아서면 나는 혼자다. 다른 약속도 없다 내게 연결된 이름들이 모두 제 길을 갔다 망가진 악기처럼 나는 버려졌다 그리운 소리는 다시 내 악기줄로 길을 물으러 오지 않는다 가슴의 문풍지만 고독히 운다 물을 긷는 자도 돌아갔다 산이 비어 더 크게 나를 안는다 이런 시간 나는 시를 쓰지 않는다 해지고 나서는 사람을 맞지 않는다 문을 열어놓고 빈 산과 벌레소리만 집안 가득 맞아 들인다 혼자 있는 악기만 운다 - 이성선 시 '일몰 후'
시인은 '내게 연결된 이름들이 모두 제 길로 갔다'라며 자신이 '망가진 악기처럼' 버려졌다고 합니다. '가슴의 문풍지만 고독하게 우는' 시간이면 시인은 차라리 '빈 산과 벌레소리만 집안 가득 맞아'들입니다.
큰산이 시인을 안고 있어도 벌레소리가 집안 가득해도 시인의 고독은 망가진 악기처럼 쓸쓸하고 누추합니다. '혼자 있는 악기'는 시인 자신이겠지요. 시인의 속 깊은 울음소리는 이 밤 미천골을 지나 운두령을 넘어 강원도 정선에 있는 가리왕산까지 옵니다.
가리왕산 하봉 골짜기에 있는 소설가 강아무개의 집에 머문 시인의 울음은 곧 시가 되고 바람이 되어 훠이훠이 산자락을 오릅니다. 시인의 시는 노래가 되어 기타로 퉁겨지고 읍내의 선술집 벽에도 걸립니다. 이런 날은 망가진 악기처럼 버려진다 한들 쓸쓸할 일 하나 없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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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촌의 어둠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먼저 데리고 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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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강기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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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이성선 시인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이성선 시인은 설악의 품에서 태어나 설악으로 돌아갔습니다. 5년 전 산벚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던 날 시인은 노래처럼, 시처럼, 유언처럼 설악의 골짜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를 만난 건 순전히 시를 통해서일 뿐입니다. 훌쩍 한계령을 넘어 그를 만나러 갔어도 되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깨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 우주를 담아내는 그의 시어는 생의 확인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미시령을 넘다가, 혹은 한계령을 넘던 중에 어디로든가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시인이 있었기에 굳이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 설악을 찾았다가 흰 수염을 하고 도포 자락을 날리는 도인을 만나거든 그가 이성선 시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어느 겨울 날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홀로 걸어가는 이가 있다면 그 또한 이성선 시인이 틀림없을 겁니다.
내가 최후에 닿을 곳은 외로운 설산이어야 하리 얼음과 백색의 눈보라 험한 구름 끝을 떠돌아야 하리 가장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 그곳에서 모두를 하늘에 되돌려주고 한 송이 꽃으로 가볍게 몸을 벌리고 우주를 호흡하리 산이 받으려 하지 않아도 목숨을 요구하지 않아도 기꺼이 거기 몸을 묻으리 영혼은 바람으로 떠돌며 고절(孤絶)을 노래하리 그곳에는 죽은 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히 태양을 향하여 무(無)의 뼈대를 창날같이 빛낸다 침묵의 바위가 무거운 입으로 신비를 말한다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에서 무일푼 거지로 최후를 마치리. - 이성선 시 <절정의 노래 1> 전문
시인의 유언 같은 시입니다. 시에서처럼 시인은 비단 눈 덮인 설악이 아니라도 어디서든 만날 수 있습니다. 죽은 주목나무가 살아 있는 나무보다 더 당당하게 서 있는 함백산에서도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 '말을 버린 곳'인 가리왕산 자락에서도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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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지는 시간엔 시를 쓰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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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강기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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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한껏 기지개를 켜면서 골짜기를 내려오는 이가 있다면 그가 이성선 시인입니다. 얼어붙은 얼음을 깨다 새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이를 만난다면 그가 이성선 시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시인은 '가슴에 사랑하는 별 하나'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외로울 때 부르면 다가오는 별 하나'를 소망했습니다. 시인은 '마음 어두운 밤 깊을수록 우러러 쳐다보면 반짝이는 그 맑은 눈빛으로 나를 씻어 길을 비추어 주는 그런 사람 하나 갖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TV에선 황금연휴라고 떠들썩하지만 가리왕산 자락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황금연휴도 크리스마스 이브도 모르는 가리왕산은 여느 때와 다름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엔 이성선 시인을 집으로 초대해야겠습니다. 시인을 위해 밤하늘의 별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 하나도 불러야겠습니다.
모닥불로 언 몸 녹여가며 그들과 쓴 소주 한 잔 마셔야 겠습니다. 산짐승들도 초대하여 긴 밤을 보내야겠습니다. 하룻 밤을 꼬박 세운다 해도 자동차 불빛 하나 지나가지 않는 가리왕산 자락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이성선 시인에게 알려 줘야 겠습니다.
외로움에 지칠 때면 사랑하는 별 하나 가슴에 안고 가리왕산 자락으로 마실 오라는 말도 덧붙여야겠습니다. 홀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는 이 있다면 가리왕산 자락으로 오십시오. 모닥불에 감자와 고구마를 굽겠습니다. 이슬로 씻어낸 술잔도 비워두겠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흔듭니다. 컹컹, 하는 울림은 골짜기를 넘어 월평으로도 가고 장전계곡으로도 갑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엔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올 테니 짖지 말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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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지는 시간은 하루 중에서 가장 정직해지는 시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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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강기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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