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대만 동부③ 회색 안개가 자욱한 태초의 풍광

피나얀 2007. 2. 23. 19:44

 

출처-[연합르페르 2007-02-23 09:57]




강원도의 영월이나 정선에서처럼 대만 동부의 길은 거개가 심하게 휘어져 있었다. 그만큼 산이 많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는 설악산과 오대산을 익히 돌아봤던 터라, 여행하는 며칠 동안 '대만 동부는 강원도와 같다'는 등식을 성급히 성립시킬 뻔했다.

 

하지만 어설프게 적용시켰던 가설은 타이루거(太魯閣)에서 단번에 깨졌다. 한국에는 타이루거에 비길 만한 명소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원주민 말로 '종족'이라는 뜻을 가진 타이루거는 중국어로는 '웅장한 산'쯤으로 해석된다. 실은 산이 아니라 해발 2000m의 산들 사이로 깊숙이 들어간 대리석 협곡이다. 흘러내리는 물이 돌을 깎기도 하고, 산들이 솟아오르기도 해서 좁고 깊은 골짜기가 만들어졌다.

 

단순하게 기암절벽들이 약간의 틈을 두고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런데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 백록담도 1950m에 불과하니, 이곳에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규모와 높이에서 우리의 산보다 월등한 셈이다.

 

타이루거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는 해가 떠서 뙤약볕이 내리 쬐더니 오후에는 구름이 몰려와 잔뜩 흐려졌다. 해변도로에서 보면 타이루거에는 언제나 회색 안개가 자욱하여 영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화롄을 떠난 버스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이 솟은 협곡 사이를 곡예하듯 올라갔다. 타이루거를 관광할 때 이용하는 도로의 이름은 '중부횡관공로(中部橫貫公路)'. 장제스가 동서 간을 잇는 국도의 필요성을 절감한 후 건설토록 명령했다.

 

대만의 허리를 동서로 가르려던 시도는 역시 산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퇴역군인과 죄수가 동원된 3년 남짓의 공기 동안 212명이 사망하고, 702명이 다쳤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타이루거의 지질이 약해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삽과 도끼만으로 길을 놓다 보니 사고가 일어나기 쉬웠다. 정부에서는 아쉽게 유명을 달리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도로 초입에 창춘츠(長春祠)를 건설하고 위패를 모셨다.

 

봄이 오면 제비들이 날아온다는 동굴 '옌쯔커우(燕子口)'를 지나쳐 '주취둥(九曲洞)'에 닿았다. 산을 깎아 만든 동굴은 밝음과 어둠의 중간상태에 있었다. 반대편 절벽은 환하게 보였지만 나머지 세 방향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주취둥의 어떤 지점에서는 계곡의 상승기류가 강해서 가벼운 물건을 던지면 가라앉지 않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주취둥에서 더 올라가면 절과 호텔이 보이는 '톈샹(天祥)'이 나오지만 이곳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대자연의 위대함과 장엄함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 원주민과 한족이 공존하는 도시, 화롄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게 패배한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피했을 때 동행했던 본토인은 200만 명에 육박했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이들은 문화와 전통이 상이했고 방언도 제각각이었다.

 

푸젠(福建)성 출신이 다수를 점했던 대만인은 새로운 이주민의 출현에 거부감을 느꼈고 그들을 '외성인(外省人)', 자신을 '본성인(本省人)'이라 불렀다. 하지만 당시 대만의 주인이라 생각했던 백성들 역시 한때는 이방인이었다.


재작년 대만 텔레비전에서는 최초로 원주민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방영했다. 젊은 원주민 형제가 타이베이로 상경해 겪는 어려움을 담은 이야기는 원주민방송을 통해 전파를 탔다.

 

그런데 원주민방송의 개국을 도운 인물은 공교롭게도 한족인 천수이볜(陣水扁) 총통이었다. 그는 중국의 통일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대륙과는 차별화되는 대만 고유의 정체성이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한족간의 분쟁에서 도구로 이용된 점이 안타깝긴 하지만 주류 사회에서 비켜나 있던 원주민에게는 나쁘지 않은 '정치적 전략'이었을 것이다.

 

산맥 동쪽에 흩어져 살고 있는 원주민 11개 종족 가운데 가장 수가 많은 것은 아메이(阿美)족이다. 동쪽 평야지대에 뿌리를 박고 생활하는 그들은 한족과의 동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아직도 모계사회의 형태를 띠고 있고, 7~8월에는 '수확제'를 실시하는 등 독자적인 문화가 남아 있다.

 

여름이 아니어도 화롄에서는 아메이족의 춤과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화롄시 교외에 위치한 아메이문화촌(阿美文化村)에서는 매일 밤 관광객을 상대로 전통적인 춤과 결혼식을 선보인다. 부채춤을 떠올리는 귀엽고 앙증맞은 안무와 관객의 참여를 통해 흥겨운 축제의 장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문화촌 인근의 '난삔(南濱)'에는 야시장이 열려 낮 동안의 열기를 지속시킨다. 중화권에 널리 퍼져 있는 야시장이 대만이라고 해서 없을 리 없었다.

 

놀이와 음식, 쇼핑을 한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대만의 야시장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를 지향했다. 인형이나 장난감을 놓고 벌이는 게임은 다트, 농구, 마작 등 ‘심심풀이 놀이’나 마찬가지였다. 간식과 폭죽을 파는 상인도 자리를 차지하고 손님을 끌었다.

 

화롄 시내로 향하는 동안 작은 공원에서는 또 다른 아메이족 민속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내용은 대동소이했고, 복장도 거의 동일했다.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중국인 특유의 기질이 대만에서도 발휘되고 있는 듯했다. 화롄에서 원주민과 한족은 같은 공간 속에서 활동하며 각자의 영역을 줄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