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얀™♡【여행】

이스라엘③ 천연의 요새, 마사다를 누비는 즐거움

피나얀 2007. 3. 3. 19:20

 

출처-[연합르페르 2007-03-02 10:00]




엔보켁에서 사해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자 사해가 모습을 감추고 바닷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은 물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해의 북쪽과 남쪽을 연결해주는 수로이다. 사해는 이곳에서 끊어졌다가 수로를 통해 다시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북쪽 사해의 푸른 수면이 모습을 드러낼 쯤 차가 서쪽의 산악지대를 향해 진입했다. 마사다 국립공원(Masada National Park)의 웅장한 절벽 성채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의 산들과 토양의 빛깔이 똑같아 그냥 지나쳐버리기 쉬운 천연의 요새이다.

 

마사다는 유대인 고위 성직자인 요나단(Jonathan)이 처음 세운 요새로, 유대왕인 헤로데스(헤롯왕, Herodes, BC37-BC4)는 도피처이자 겨울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호화로운 궁전을 건설하기도 했다. 또 서기 70년 8월 예루살렘이 로마에 함락된 후,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가 이끄는 유대인 열성당원(Zealot) 960여 명이 피신해 3년 동안 로마에 저항한 곳이다.

 

당시 로마의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 장군은 8천 명으로 구성된 로마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위에 8개의 캠프를 둘러 세웠다. 험난한 지형 때문에 요새를 쉽게 정벌하지 못하자 로마군은 요새 서쪽에 나무와 흙을 이용해 거대하고 완만한 경사로를 쌓기 시작한다.

7개월 만에 경사로가 완공되고 로마군은 성벽을 부수는 도구를 갖춘 탑을 경사로 위에 옮겨왔다. 요새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도자인 벤 야이르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군의 노예로 굴욕을 당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가족들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빼앗아 자유인으로서 영광되게 죽자."

 

로마군이 진격했을 때 요새 안은 고요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식수와 식량도 그대로 남겨놓았다. 마사다에서는 여인 2명과 어린이 5명만이 물웅덩이에 숨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이 비극의 이야기는 유대인 출신 로마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에게 전해져 역사에 기록됐다.


케이블카를 타고 요새에 오르자 푸른 사해와 메마른 광야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면으로는 기다란 뱀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생긴 물길이 식수를 저장하는 웅덩이까지 이어져있다. 웅덩이의 물은 완전히 말라버렸지만 언제라도 비가 오면 이 안을 가득 채워줄 것 같다.

 

계단을 따라 오르자 경사가 완만한 평평한 모습의 정상이 펼쳐진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비춰 누런 빛깔의 평지는 더욱 광활해 보였다. 2000년 전 유대인의 주거지와 맷돌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창고를 지나자 헤로데스가 지었다는 북쪽 궁전(Northern Palace)의 맨 위쪽 건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헤로데스와 그의 가족들을 위한 침실과 전망대가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멀리 사각형, 마름모꼴의 로마군 진지들이 아득한 사해를 배후로 삼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둥근 형태의 궁전 연회장 흔적이 벼랑의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가파른 서쪽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 벼랑을 깎아 낸 길을 따라가 연회장에 도착했다. 둥그런 벽을 둘러 기둥이 있었다고 하지만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또 다른 사각형의 연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 기둥은 무너졌지만 기둥 중에는 상층부에 아칸서스 잎을 양각한 코린트식 문양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들도 있다.


동쪽의 계단 아래에는 온탕, 냉탕, 열탕을 갖춘 작은 목욕탕이 있지만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마사다 유대인의 최후의 날을 엿볼 수 있는 옷가지와 샌들, 무기 등의 유적과 해골, 여자의 땋은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시 정상으로 올라 서쪽 벼랑을 따라 가자 유대교 회당(Synagogue)과 비둘기사육장이 나타났다. 지금은 비둘기가 없지만 당시 이곳에서 키우던 비둘기는 식용으로 사용되었고, 배설물은 비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비둘기사육장 옆쪽의 전망대 아래로는 경사진 흙더미가 아래에서부터 요새의 성벽 아래까지 쌓여있다. 로마군이 이곳을 정복하기 위해 쌓았던 흙더미다. 그 뒤로는 로마군의 또 다른 진지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을 통해 진입하며 질러대던 로마군의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