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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스크랩】 14일째 눈, 정말 '이 죽일 놈의 눈'입니다

피나얀 2005. 12. 17. 18:18

 


 

 

▲ 육십 평생에 이런 눈은 처음 본다는 우리 아파트 경비 아저씨. 눈만 봐도 '넌덜증'이 난다고 하셨다.
ⓒ2005 배지영
지난 12월 4일 일요일에 첫눈이 왔다. 그 다음 날도 왔다. 그 다음 다음 날도 계속 왔다. 그러다가 토요일에는 눈발만 휘날렸다. 이제 그치겠지 했다. 일요일 저녁부터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눈은 엿새째 퍼부었다. 아침에 그치는가 싶으면 오후에 내리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싶어서 일어나자마자 부엌 창으로 밖을 보면 눈은 또 쌓여 있었다.

넉가래로 눈을 치우는 경비 아저씨는 육십 평생에 이렇게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은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날마다 쏟아지는 눈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아마 2m도 넘게 쌓였을 거라면서, 이제 눈 내리는 것만 봐도 '넌덜증'이 난다고 하셨다.

내가 살고 있는 군산뿐만 아니라 정읍이나 고창은 눈이 더 많이 내렸다. 70여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나 동물을 기르는 축사는 무너져 내려서 농민들은 내려앉은 비닐하우스처럼 폭삭 주저앉아 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네들을 차마 못 볼 정도다.

영광에 사시는 친정 아빠가 "아빠 엄마는 무사하다. 딸 운전 조심해라"는 문자를 보내실 만큼,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은 위협적이다. 술을 많이 드셔서 돌아가신 친척 할아버지를 붙잡고, 친척 할머니가 "이 죽일 놈의 술, 이 죽일 놈의 술"하신 것처럼, 14일째 내리는 눈은 '이 죽일 놈의 눈'이다.

▲ 열나흘 째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이런 모습이다. 눈 안 쌓인 날이 없다.
ⓒ2005 배지영
날마다 새롭게 눈이 쌓여도 이른 새벽이면, 일터를 향해 눈길 위를 차로 서서히 달려 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나는 걸어서 아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 준다. 작년까지는 아이가 신고 벗고 불편할까 봐 복숭아뼈 넘는 부츠를 사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올해는 다르다. 발목 부츠를 신고서 유치원까지 걸어가면 아이 신발은 물론 바짓가랑이까지 완전히 젖어 있다.

아이는 유치원에 걸어갈 때마다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엄마, 혹시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리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잘 때에 큰 덩어리가 막 내려오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아이라서 눈을 고달프게 보지 않고 재밌어 한다. 내가 유치원 지각이라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아이는 눈 위에 드러누워 눈도장을 찍고, 나무 아래에 서서 나를 쳐다본다. 나는 할 수 없이 나무를 흔들어서 눈을 폭포처럼 쏟아지게 만들어 주고, 눈싸움을 해서 일부러 쓰러져 준다.

하지만 일터를 오갈 때는 문제였다. 차를 놓고 나가면 택시가 안 잡힌다. 걸어 다니자면 그 거리가 멀다. 오전 11시쯤이면 큰 길에는 눈이 녹아서 차를 갖고 나간다. 저녁이면 길은 또 빙판이 되어서 10분쯤이면 넉넉히 집에 올 수 있는데 40분쯤 걸리기도 한다.

▲ 유치원에 걸어가는 아이.
ⓒ2005 배지영
며칠 전에 내 동생은 아이 유치원 데려다 주면서 찍은 사진을 올려 놓은 우리 집 홈페이지를 보고는, 눈이 많이 내리는 일본의 어느 지역 같았는지 "내 조카가 언제 일본에 갔디야?"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동생과 나는 함께 장 보러 갈 때 만났다. 서로 눈만 내놓은 채 완전 무장을 하고서는 둔한 몸으로 손을 흔들면서 영화 <러브 레터>처럼 "오겡끼 데스까?" 했다.

우리 시댁은 차로 20분 거리지만 지금은 아주 먼 곳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볼 일이 있어 시댁에 잠깐 가겠다고 하니까 눈 녹을 때까지 절대 오지 말라고 하셨다. 진짜 고립 생활이 따로 없다. 주로 노인들이 사시는 시골에 환자라도 생기면 정말 큰일이 나고 말겠다.

나 어릴 때 우리 동네는 논과 밭을 모두 경지 정리한 적 있다. 포클레인으로 파헤쳐놨는데 그냥 논이고 들이었던 곳 속에 엄청나게 깊은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 꽤나 강렬했나 보다. 그 뒤로 몸이 아플 때면 꼭 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다.

어른이 되고 나서 나는 거의 아프지 않아서 3년에 한 번 꼴로 감기에 걸릴까 말까 한다. 하지만 만약 아프게 된다면, 나는 올 겨울이 꿈에 나타날 것 같다. 펑퍼짐하고 포근한 눈 속에 숨어 있는 빙판. 내 차는 길 위에서 미끄러지고, 할 수 없이 차를 두고 조심조심 걸어가지만 자빠진다. 내 턱은 안 깨졌지만 무안해서 벌떡 일어나야 하는 꿈.

▲ 눈이 아무리 많이 와도 일터로 오가는 차들.
ⓒ2005 배지영
▲ 도로는 염화칼슘을 뿌려서 눈이 녹지만 인도는 계속 눈이 쌓인다.
ⓒ2005 배지영


/배지영 기자


덧붙이는 글
정읍, 고창, 군산, 부안은 거의 날마다 대설주의보와 대설 경보가 내렸습니다.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고, 일기 예보에서는 내일도 눈이 내릴 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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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2005년 12월 17일 (토) 17:04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