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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파마 70년 50~60년대 해방촌 미용실앞엔 수백m 줄

피나얀 2006. 4. 15. 19:54

 

 


1937년 처음 들어와 가격은 쌀 두 가마니값
처음 문 연 화신미용실선 부인과 첩이 싸우는 일도

 

“검은 포도송이처럼 굽실굽실 물결친 머리털은 애급여왕의 아름다움을 생각케 한다.”

조선일보가 발행한 잡지 ‘조광’(朝光·1940년 10월호)에 ‘전발(電髮)엘레지’라는 제목으로 쓰인 파마 예찬이다. 당시 파마는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진다고 하여 전발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파마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37년. 당시 파마는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최초로 파마를 한 여성으로는 영화배우 이월화, 소설가 김명순, 이화학당 출신의 문마리아·정애식 등으로 기록이 엇갈리지만, 대개 신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파마 값은 5∼6원. 쌀 두 가마니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쌌다. 1940년대 초에는 서양의 퇴폐풍조라며 사치품금지령에 의해 파마가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마는 부유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퍼져갔다. 당시 국내에 최초로 문을 열었던 오엽주의 ‘화신 미용실’(1933년)에서는 부인과 첩이 싸우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당시 파마 스타일은 아이론을 이용해 곱슬거리는 느낌을 살리는 정도였다.

해방 이후 1950∼60년대에는 전기가 부족해 숯을 얹어 머리에 열을 가하는 ‘숯파마’가 등장했다. 숯으로 파마 집게를 데워 은박지를 대고 머리에 꽂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파마 도중 숯가루가 떨어져 옷에 구멍이 나거나 머리카락이 타는 경우도 있었다. 52년 동안 미용사로 일해온 미용 명장(名匠) 이온숙(73)씨는 “당시 가난한 일반여성들은 파마를 6개월이나 1년에 한번씩 했기 때문에 최대한 뽀글뽀글 말아서 풀리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일명 ‘아줌마 파마’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용산 해방촌의 ‘진달래미용실’처럼 유명한 곳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번호표를 들고 몇 백m씩 줄을 서있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에는 정수리 부위를 최대한 부풀린 스타일이 유행했다. 고(故) 육영수 여사의 헤어스타일이 바로 그것.

 

1970년대는 커트의 전성기였지만, 중반 이후 소위 ‘바람머리’(바깥으로 뻗치는 파마머리)가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활동적이고 손질이 간편한 스타일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파마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

 

머리카락 길이가 길든 짧든 웨이브(Wave)를 넣었다. 헤어 무스, 젤, 스프레이 등 미용제품도 보급되었다. 파마와 함께 다양한 색상의 염색을 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유명 헤어디자이너 박준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유행하는 파마의 트렌드가 없다”고 했다. 각자 원하는 스타일을 직접 연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난다는 것. 이때 등장한 파마가 ‘스트레이트 파마’다. 스트레이트 파마의 등장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반영구적으로 찰랑거리는 직모(直毛)로 만들었다.

 

특히 1999년에 등장한 ‘매직 스트레이트’는 긴 머리의 혁명이었다. 한 듯 안 한듯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를 타고 마치 다리미로 다린 듯 머리카락을 폈기 때문이다. 70년 세월 동안 인기를 끄는 파마의 비결은 뭘까. 이온숙씨는 “파마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만드는 기초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파마 머리가 아름답다는 겁니다. 아름답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 사랑을 받을 수가 없어요.”

 

 

 


(박란희기자 [ rhpark.chosun.com])

(김연주기자 carol@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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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2006-04-15 03:27]